이순신 흥양수군 800리길 6코스
이순신 흥양수군 800리길 6코스는 적대봉 주차장을 출발하여 송광암, 대흥마을, 소록도, 쌍충사를 경유하여 녹동신항 주차장까지 19km이다.

6코스는 적대봉 주차장을 출발하여 1209년에 해동 불일 보조국사께서 창건하셨다는 송광암까지의 한적한 길을 걸을 수 있고 꼬불꼬불 산길을 돌아돌아 거금대교와 녹동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에서 한참을 노닥거릴 수 있다.

금산면소재지 대흥마을 길을 통과하여 거금대교 아랫길에서는 트릭아트 사진을 촬영할 수 있고, 소록도 산길, 소록대교를 거쳐 쌍충 공원에 도착하면 1587년 손죽도해전에서 전사한 이대원 장군과 1592년 부산포해전에서 전사한 정운 장군,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수군 동상도 탐방할 수 있다.

이어서 쌍충사를 탐방하고 원도심 녹동항을 지나 녹동신항에 도착한다.
6코스-1 녹도진(鹿島鎭)
녹도만호가 사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1406년의 일이었고 1396년 말경에 이미 전국적으로 군선이 배치되어 있었다는 것과 이후 1398년에는 만호, 천호, 백호 등 수군직의 품계를 설정하였던 것을 보면 늦어도 1398년 이전에 녹도만호진이 설치되었다고 할 수 있다.

녹도진은 1425년 전라도 수군처치사 휘하의 여도(呂島) 전라좌도 도만호진에 속한 만호진으로서 장흥도호부 소속이었다. 그 후 1441년(세종 23) 흥양현의 설치와 함께 흥양현 소속으로 바뀌게 되었고, 1457년(세조 3) 1월 고흥포에 있던 축두진(築頭鎭)이 폐지됨에 따라 그 선군을 발포진과 함께 물려받았다.
녹도진은 1479년(성종 10) 1월에 내례포진이 전라좌수영으로 승격되면서 전라좌수영 사도진관(蛇島鎭管)에 편제되었다. 이러한 편제는 녹도진이 1895년 7월 공식적으로 폐지될 때까지 줄곧 유지되었다.
녹도진성은 1485년(성종 16) 3월에 그 규모가 결정되었다. 사도순찰사(四道巡察使) 홍응의 보고에 따르면 남향이고 둘레가 2,020척, 동서 길이가 810척, 남북 너비가 44척, 높이가 13척이며 보 안의 샘이 두 개가 있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5년 반이 지난 1490년(성종 20) 10월 말에 완공되었다. 녹도진과 관련된 불망비 3기가 쌍충사 입구에 남아있다.
이순신 장군은 1592년 2월 22일 흥양읍을 떠나 흥양선소에 들러 점검을 마친 후 별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녹도진으로 갔다. 녹도진에 도착한 이순신은 지휘관인 만호 정운에게 수군과 무기 상태를 보고받고 점검하였다.
이순신은 녹도진의 점검을 마친 후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난중일기에 녹도(鹿島)는 모두 7회 언급되었고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난중일기 1592년 2월 22일(계축)
아침에 공무를 마친 뒤 녹도(鹿島)로 갔다. 황숙도도 동행했다. 먼저 흥양전선소에 이르러 배와 기구들을 친히 점검하였다. 그 길로 녹도로 가서 새로 건축한 봉두문(峯頭門)의 누각 위로 곧바로 올라가 보니 경치의 아름다움이 으뜸이었다.
만호의 애쓴 정성이 안 미친 곳이 없었다. 흥양현감, 황능성[능성현감 황숙도], 만호와 함께 취하도록 마시고 또 겸해서 대포 쏘는 것도 보았다. 얼마 동안 촛불을 밝힌 뒤 파했다.
6코스-2 쌍충사

쌍충사는 1587년(선조 ) 손죽도 해전에서 전사한 이대원 장군과 1592년 부산포 해전에서 전사한 정운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이대원(李大源, 1553~1587): 임진왜란 직전 녹도진 만호
이대원은 본관이 함평이고 1553년(명종 8) 양성(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고 1583년(선조 16) 무과에 합격했으며, 1587년(선조 20) 35세로 손죽도 해전에서 전사했다. 자는 호연(浩然). 할아버지는 진사(進士) 이인(李仁)이며, 아버지는 이춘방(李春芳)이다.
1586년 선전관으로 있다가 녹도만호가 되었다. 1587년 1월 말에 왜구가 침입하자 부하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20여 척의 배를 대파하는 전과를 올리고 적장을 붙잡아 수사 심암(沈巖)에게 바쳤다.
그러나 전공을 자신에게 돌리려는 심암의 요청을 거절하여 미움을 샀다. 2월 1일 다시 왜구가 흥양에 침입하자, 심암의 명으로 군사 100여 명을 이끌고 출병하여 손죽도(損竹島) 해상에서 적과 격투 끝에 붙잡혀 항복을 거부하다가 살해당하였다.
이에 앞서 관찰사의 장계(狀啓)로 이대원의 승전이 조정에 보고되어 심암은 파면되고 대신 수군절도사에 발령되었으나, 조명(朝命)이 도달하기 전에 죽었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고향에 충신정문(忠臣旌門)이 세워졌다. 흥양의 쌍충사(雙忠祠)에 제향되었다.
-다음 백과사전-
정운(鄭運, 1543~1592): 임진왜란 당시 녹도진 만호1
정운의 자(字)는 창진, 본관은 하동. 거주지는 전라남도 영광이다. 훈련참군 응정의 아들로 1543년에 나니 이순신보다 두 살 위다. 어려서부터 의협한 성격이 있어 언제나 절개 아래서 정의로 죽는 것을 스스로 기약했다.
1570년(선조 3)에 무과에 올라 거산 찰방이 되었을 때, 감사 수행인이 불의한 장난을 하고 돌아다니므로 잡아다가 매를 때린 일로 감사에게 미움을 받게 되고, 또 그로 인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나가 경상남도 웅천현감이 되었더니 거기서도 곧 물러났었고, 얼마 후에 제주 판관이 되었을 때도 역시 목사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몇 해 동안 벼슬하지 않고 있다가 임진년에 녹도만호가 되었다. 마침 전쟁이 벌어지자 그는 좌수사 이순신에게로 달려가 회의하는 석상에서 나아가 싸울 것을 극력으로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제1차, 제2차, 제3차 출전 등에 매번 선봉을 서서 큰 공을 세우고 마침내 제4차 출전의 부산 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순국 후에 조정에서는 그에게 병마절도사로 추증하고 후에 다시 병조참판을 가증하였으며, 정각을 세우게 하는 한편 충장이라 시호하였다.
그는 평소에 ‘정충보국(貞忠報國)’ 4자를 칼에 새겨 자기의 검명을 삼고 충의의 일생을 보냈거니와, 그가 전몰하자 적들이 “정 장군이 죽었으니 인제는 쉽다.”라고 하였음을 보면 적들이 그를 얼마나 무서워하였던가를 알 수 있다.
이순신의 건의로 그를 녹도에 있는 이대원 사당에 같이 모시게 되었고, 또 그이 고향인 영암에도 1652년(효종 3)에 충절사를 세우고 그를 제사하였는데, 사액은 그로부터 30년 후인 1681년(숙종 7)에 되었다.
-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 2권 33쪽-
난중일기에 정운은 모두 3회 언급되었고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난중일기 1592년 5월 3일(임신) 가랑비가 아침내 왔다.
경상우수사의 답장이 새벽에 왔다. 오후에 광양현감[어영담]과 흥양현감을 불러서 함께 이야기하는 중에 모두 분한 마음을 나타냈다. 본도 우수사(이억기)가 수군을 끌고 오기로 서로 약속했는데, 방답의 판옥선이 첩입된 군사를 싣고 오는 것을 보고 우수사[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온다고 좋아하였으나 군관을 보내어 알아보니 방답의 배였다.
놀라움을 이길 수 없었다. 조금 뒤에 녹도만호[정운]가 알현을 청하기에 앞으로 불러들여 물으니, “우수사는 오지 않고 왜적은 점점 서울 가까이 다가가니 통분한 마음을 이길 길이 없으며, 만약 기회를 늦추다가는 뒤에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곧 중위장[이순신 李純信]을 불러 내일 새벽에 떠날 것을 약속하고 즉시 보고서를 수정했다. 이날 여도 수군 황옥천이 집으로 도망간 것을 잡아다가 목을 베어 군중에 매달았다.
송여종(宋汝悰, 1553~1609): 임진왜란 당시 녹도진 만호2
송여종의 자(字)는 언온, 본관은 여산. 전라남도 고흥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찰방 송창이다. 임진왜란 때 낙안군수 신호(申浩)의 막하에 있다가 출전 때마다 공로를 세웠다.
특히, 좌수사 이순신에게 그 전공을 인정받아 장계(「부산파왜병상」) 운반의 중대한 사명을 받았다. 그 공로로 전사한 정운 대신 녹도만호가 되었다. 1594년 진중 과거에 급제하고, 명량 해전과 마지막 노량 해전까지 전공을 세웠다.
1599년에 단성현감이 되고, 1600년에 절충장군에 올라 사복시정이 되었다. 그 후 임치첨사와 흥양현감, 경상좌수군 우후 등을 역임하였다.
-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 2권 131쪽-
난중일기에 녹도만호 송여종은 모두 25회 언급되었고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명량대첩을 함께 이루었던 날의 난중일기이다.
난중일기 1597년 9월 16일(갑진-갑오) 맑음.
이른 아침에 별망[특별히 편성한 망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그 수효를 알 수 없는 적선이 곧바로 우리 배를 향하고 있다.”라고 했다.
여러 장수를 불러 약속을 밝힌 다음 즉시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걷어 올리고 바다로 나아가니, 적선 330여 척이 우리 배들을 에워쌌다. 여러 장수는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대적할 수 없을 것이라 스스로 헤아리고 곧 회피할 꾀만 내는데, 우수사 김억추는 가물가물한 먼 곳으로 물러가 있었다.
나는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며 지자 현자 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니, 탄환이 바람과 우레처럼 쏟아졌다. 군관들은 배 위에 모여 서서 화살을 빗발같이 쏘았다. 적의 무리는 당해 내지 못하고 다가왔다. 물러갔다 하였다.
그러나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서 형세가 장차 어찌 될지 알 수 없어, 온 배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이 변했다. (대장선이 홀로 적선 속으로 들어가 포환과 화살을 풍우같이 쏘아대건만 여러 배들은 바라보면서 진군하지 않아, 장차 사태를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배 위에 있는 군사들이 서로 돌아보며 낯빛이 변했다.)
나는 조용히 타일러 말하기를, “적이 비록 천 척일지라도 우리 배에 덤벼들지 못할 것이니, 모두 마음을 흔들리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쏴라.”고 했다. 그리고 여러 장수들의 배를 돌아보니, 먼바다로 물러가 있으면서 바라만 보고 진격하지 않았다.
(이미 1마장 가량 물러났고,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멀리 떨어져 가물가물했다.) 배를 돌려 바로 중군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목을 베어 효시하고 싶었지만, 내 전선이 뱃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가 차례차례 더 멀리 물러나고, 적선이 점점 달려들게 되어 사세가 낭패될 것이다.
그래서 즉시 나팔을 불게 하고 중군 영하기(中軍 令下旗)를 세우고 또 초요기를 세우니, 중군장 미조항첨사 김응함의 배가 점차 나의 배에 가까이 오고, 거제현령 안위의 배가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말하기를,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한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했더니, 안위가 황급히 적선 가운데로 돌입했다.
또 김응함을 불러서 말하기를,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하고 싶지만, 적의 세력이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 하였다.
두 배가 곧바로 교전할 즈음, 적장이 그 휘하의 배 3척을 지휘하여 일시에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붙어 기어오르려고 서로 다투니, 안위 및 배 위의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해서 마구 치다가 거의 기진맥진하기에 이르렀다.
(곧바로 들어 싸우려 할 때, 적장의 배와 다른 적선이 안위의 배에 달라붙고 안위의 격군 7~8명이 물에 뛰어들어 헤엄을 치니 거의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배를 돌려 바로 들어가서 (안위의 배가 있는 데로 갔다. 안위 배 위의 군사들은 죽기를 한하여 마구 쏘아대고, 내 배의 군관들도) 빗발같이 쏘아대어 적선 3척을 남김없이 모조리 섬멸하였다.
(하니 천행 천행이다)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도 뒤쫓아와서 합력해 적을 쏘았다 (우리를 에워쌌던 적선 30척도 부서지니 모든 적은 저항하지 못하고 다시 침범해 오지 못했다. 그곳에 머무르려 했으나 물이 빠져 배를 정박하기 어려웠으므로 건너편 〇〇포로 진을 옮겼다가 달빛을 타고 당사도로 옮겨 밤을 지냈다.
투항한 왜인 준사는 곧 안골 적진에서 투항해 온 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바다를 굽어보며 말하기를, “그림 무늬 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자가 바로 안골진의 적장 마다시다” 라고 했다. 내가 김석손을 시켜 갈고리로 뱃머리에 끌어 올리게 하니, 준사가 좋아 날뛰면서, “마다시가 맞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즉시 명령하여 토막토막 자르게 하니 적의 기운이 크게 꺾였다. 여러 배들이 적이 침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일시에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일제히 진격하여 각각 지자‧현자 총통을 쏘고,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다.
적선 30척을 깨뜨리자, 적선들이 물러나 달아나고, 다시는 감히 우리 수군에게 가까이 오지 못했다. 이번 일은 참으로 천행이었다. 물결도 몹시 험하고, 형세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당사도로 진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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