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임진왜란과 흥양수군(興陽水軍) 8

8. 노량해전과 흥양 수군

8. 노량해전과 흥양 수군   1)순천 예교성 수륙합공전의 수행1598년(무술년) 9월 하순부터 동로군, 중로군, 서로군과 수로군의 공격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중 수로군의 활동인 순천 예교성(曳橋城) 수륙합공전을 중심으로 당시의 전황을 살펴보면, 예교성(曳橋城)은 왜교성(倭橋城)이라고도 하며 순천 동남쪽 25리 되는 곳에 있다. 이 성은 여수 반도의 목을 차지하여 서쪽은 산에 의지하고 북•동•남의 삼연은 광양만에 면하였으며, 북쪽에 하나의 채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1597년(정유년) 겨울 중에 일본군의 우키다(宇喜多秀家)•토도(藤堂高虎) 등이 신축한 것이다. 당시 예교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수는 1만 5천 명이고, 예교성의 형세는 3면이 바다로 둘러 있어 1면만 공격이 가능한 데,..

7. 조•명 연합작전과 절이도 해전의 승리

7. 조•명 연합작전과 절이도 해전의 승리 정유재란 시기에 일본의 재침을 미리 판단한 명 조정이 이에 대비를 하던 중 일본의 공격침로가 전라도를 우선 공격 목표로 삼았다는 사실을 파악하여 명 수군의 파병을 결정하였다. 이것은 곧 서해안 해로를 통한 명의 안보 위협을 우려한 나머지 명 내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파병할 준비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명 조정이 수군 파견을 결정했다고 해서 바로 수군을 보내지는 않았다. 수군 파견이 구체화 된 것은 1597년 7월 원균이 지휘하던 조선 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패배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조선 수군의 칠천량해전의 패전, 이어서 벌어진 남원성 전투에서의 명장(明將) 양원(楊元)의 패전은 명 조정에 심각한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정유년(1597)에..

6. 수군재건과 흥양 수군

6. 수군재건과 흥양 수군   1) 고하도에서의 수군 재건(1) 수군 병력의 확충10월 29일, 조선 수군은 목포 앞바다에 있는 고하도로 진을 옮겼다. 당시 수군 병력자원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행정적인 조치가 취해져야 했다. 특히 육군이나 수군 할 것 없이 인력이 모자란 시점에서 연해안의 군현을 수군에 전속시키는 문제는 수군 병력을 확보하는 근간이 되었다. 고하도에 주둔하고 일을 때에는 순찰사 황신(黃愼)과 만나 연해안 19고을을 수군에 전속시킴으로 수군 병력 징발을 공식화하도록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당시 전라도 지역의 각 고을이 판탕되어 주민들이 피란선을 타고 해상으로 무리지어 다니거나 산 속으로 피신한 자들이 많았다. 따라서 이들을 수군 자원으로 획득하기 위한 노력도 병행하였고 포작을 ..

5. 수군 정비와 명량해전의 승리

5. 수군 정비와 명량해전의 승리   1) 수군력 정비 과정과 흥양 수군1597년 7월 16일 조선 수군은 칠천량해전에서 통제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및 여러 장수를 잃게 되고, 전라좌수군의 절반을 차지했던 흥양 수군도 비극적인 참패를 당했다. 이러한 전황 보고는 당시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에게도 전해졌다.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과 대책을 강구했지만 뾰쪽한 수가 없었으므로 직접 해안 지방으로 가서 확인한 후에 대책을 강구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군관 9명(송대립, 유황, 윤선각, 방응원, 현응진, 임영립, 이원룡, 이희남, 홍우공)과 함께 7월 18일부터 7월 22일까지 노량에서 거제 현령 안위, 영등포만호 조계종, 군사 및 백성, 경상 우후 이의득, 경상우수사 배설과 만나 전황을 파..

4. 장림포•부산포해전

4. 장림포•부산포해전 조선 수군은 제4차 출전에 앞서 8월 1일부터 전라좌•우도 수군이 좌수영에 미리 합류하여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때 전라좌•우도의 대소 전선은 모두 166척으로 전선이 74척, 협선이 92척으로 구성되었다. 이순신은 전선 수의 증가와 사전 훈련뿐만아니라 지휘부의 인원 보강도 추진하였다. 그중 가장 주목할 부분은 흥양 출신 수군 조방장 정걸(丁傑)을 대동한 사실이다. 정걸은 당시 80세에 가까운 고령의 노장이었다. 원거리에 있는 적의 소굴화가 된 부산포 본진을 치는 출전은 매우 위험하고 중요한 작전이었기 때문에 정걸 같은 수십 년의 해전 경험과 전략 전술 구사에 능한 그의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한 조선 수군은 1592년 8월 24일 전라좌수영을 출항하여..

3. 한산도•안골포 해전

3. 한산도•안골포 해전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연합 함대는 제2차 출전에서 72척의 적선을 분멸시키고 진을 파한 채 각자 주둔지로 복귀하였다. 1592년 7월 초 일본 수군은 가덕과 거제 등지에서 떼를 지어 출몰하였고, 일본 육군은 금산지역에까지 적세가 크게 뻗치고 있었다. 이에 대비하고자 전라좌도와 전라우도 수군은 7월 4일 저녁 때 모여 7월 5일까지 방책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7월 6일 함대를 거느리고 일제히 발선하였다. 노량에서 경상우도의 전선 7척도 합류한 후 진주 땅 창신도에 이르러 밤을 보냈다.   1) 한산도 해전의 승리7월 7일 동풍이 크게 불어서 배를 운행하기 어려웠다. 고성땅 당포에 이르니, 피란하여 산에 올랐던 미륵도의 목자(牧子) 김천손이 조선 수군 함대를 바라보고 급히 달..

2. 사천•당포•당항포•율포 해전

2. 사천•당포•당항포•율포 해전 이순신은 제1차 출전에서 적선 44척을 분멸시킨 후 전라좌수영에서 전력을 정비하고 다음 해전을 대비하던 중 일본군이 거제도 서쪽 연해안에서 여러 고을을 노략질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순신은 전라좌도의 수군을 징집하는 한편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도 6월 3일까지 전라좌수영 앞바다로 합류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흥양 수군도 전선을 정비하여 전라좌수영 앞바다에 집결하였다. 출전을 위한 사전 조치로 이순신은 군관 윤사공(尹思恭)을 유진장으로 임명하고, 수군 조방장 정걸(丁傑)을 흥양현에 머물게 하여 대비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런 다음 이순신은 5월 29일 우후 이몽구(李夢龜)와 함께 거북선 2척을 포함해 전선 23척을 거느리고 출전하였다. 전라좌수군이 노량해상..

1. 옥포•합포•적진포 해전(1차 출전)

1. 옥포•합포•적진포 해전(1차 출전)  1) 첫 출전을 주도한 녹도만호 정운 장군조선 수군이 거둔 최초의 승리는 1592년 5월 7일에 있었던 옥포해전이다. 당시 전라 좌도지역을 지키고 있던 이순신이 어떻게 해서 경상도 거제지역까지 가서 전투를 하게 되었을까?  당시 조선의 국방체제는 제승방략체제였다. 각 도별로 나눠진 구역 안에서 적이 쳐들어 올 경우 그 도의 모든 병력이 집결하여 적을 막는 체제다. 그래서 경상도 지역에서 적을 방어할 때는 경상 좌도와 우도의 군사가 자동적으로 집결하여 적을 막아야 했다. 그러나 당시 경상 좌수군은 스스로 궤멸되었고, 경상 우수사 원균이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쟁을 맞다 보니 전쟁 대비가 제대로 되지 못했다.  전선의 수는 전라 좌수영보다 많았지만 병력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