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조•명 연합작전과 절이도 해전의 승리
정유재란 시기에 일본의 재침을 미리 판단한 명 조정이 이에 대비를 하던 중 일본의 공격침로가 전라도를 우선 공격 목표로 삼았다는 사실을 파악하여 명 수군의 파병을 결정하였다. 이것은 곧 서해안 해로를 통한 명의 안보 위협을 우려한 나머지 명 내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파병할 준비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명 조정이 수군 파견을 결정했다고 해서 바로 수군을 보내지는 않았다. 수군 파견이 구체화 된 것은 1597년 7월 원균이 지휘하던 조선 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패배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조선 수군의 칠천량해전의 패전, 이어서 벌어진 남원성 전투에서의 명장(明將) 양원(楊元)의 패전은 명 조정에 심각한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정유년(1597)에 처음으로 파병된 명나라 수군은 유격 계금(季金)이 거느린 절강 수병 3천 2백 명이었다. 이후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을 위한 육군의 추가 파병과 동시에 1598년 초부터 시작되었다.
사로병진작전은 당시 일본군이 주둔해 있던 울산•사천•순천 지역의 왜성을 조•명연합군이 네 방향으로 나누어 공격하는 전략이었다.
이를 동로•중로•서로•수로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동로는 제독 마귀(麻貴)가 조선의 별장 김응서(金應瑞)군과 연합하여 울산성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의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를 공격하는 것이다. 중로는 제독 동일원(董一元)이 조선의 경상우병사 정기룡(鄭起龍)군과 연합하여,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를 공격하는 작전이었다. 서로는 제독 유정(劉綎)이 조선의 전라병사 이광악(李光岳)군과 연합하여,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공격하는 것이고, 수로는 진린(陳璘)과 조선의 통제사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과 연합하여 순천의 고니시를 협공한다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수로군을 추가한 것은 울산의 도산성 전투에서 일본군이 수로를 통해 구원군을 차단하지 못한 경험으로 판단된다. 즉 도산성 전투로부터 얻은 교훈을 거울삼아 일본군 공격작전을 육로 3방향, 수로 1방향에서 공격하는 방안을 강구한 것이다. 경리 양호가 구상한 이 작전 계획이 결국 사로병진작전으로 귀결된 것이다.([그림4-2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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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 연합군의 사로병진 작전도 |
이러한 작전 계획에 따라 무술년(1598) 6월부터 사로병진작전을 위한 군별 이동이 시작되었다. 사로병진작전 중 수로(水路)의 대장 진린은 명의 수군 병력을 이끌고 무술년(1598) 4월 27일에 요동에 도착했고, 한성에 들어온 것은 6월 중순이었다.
진린의 수군은 한성에 잠시 머물다가 6월 26일에 남하하여 1598년 7월 16일 고금도 조선 수군진영에 합류하였고 이때부터 조•명연합수군이 연합하여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 진린이 거느린 휘하 수군 병력은 2만 1천 명 정도였다.
한편 당시 조선 수군은 고하도와 고금도에서 수군 재건에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고금도에 주둔하여 미진한 분야에 대한 수군력 증강 노력에 매진하면서 예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을 견제하고 있었다. 이 시기 수군 지휘부 일부 장수 교체가 이루어졌다. 당시 전라우수사였던 김억추(金億秋)가 무술년(1598) 1월 5일 부상(父喪)을 당해 부임을 못함에 따라 1598년 2월 14일자로 거제현령이었던 안위(安衛)가 전라우수사직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무술년 6월의 상황을 보면 명량해전 직전 도주한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의 후임으로 이순신(李純信)이 임명되었고, 충청수사는 오응태(吳應台)가 보직되어 있었다. 이렇게 통제사 이하 3명의 수사가 보직되어 활동한다는 것은 그동안 수군력을 재건한 성과가 어느 정도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1) 절이도 해전의 경과
1598년 7월 16일 진린이 거느린 명 수군이 조선 수군이 주둔하고 있던 고금도 진영에 합류하였다. 이제 진린이 이끈 수군 본대는 그동안 먼저 도착하여 이순신과 함께 연합작전을 하고 있던 계금의 수군과 합력함으로써 본격적인 조•명연합수군 간의 연합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절이도 해전은 명 수군이 합류한 후 최초로 벌어진 해전이었고, 임진왜란 시기 흥양현 지역에서 있었던 유일한 해전이었다.
진린이 이끈 명 수군 5천명이 무술년 7월 16일 고금도에 도착하였다. 명 수군의 본대가 도착한 이틀 뒤인 7월 18일에 왜선 100여 척이 녹도를 침범한다는 정보를 듣고, 이순신과 진린 도독은 각각 전선을 거느려 금당도(완도군 금당면 금당도)로 나갔다. 이때 일본군선 2척이 조•명연합수군의 전선을 보고 도망치는 광경을 목격했다. 조•명연합수군이 금당도에 도착했을 무렵엔 날이 저물었으므로, 이순신은 녹도만호 송여종의 경계함대를 절이도(현재의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 북서단 해역으로 파송하여 적을 철저히 경계, 감시토록 하였다. 절이도는 당시 적에게 침법당한 녹도와 금당도 사이에 있는 섬이다.
조선 수군은 금당도에서 함대를 결진하고 적의 야습에 대비하였다. 다음 날 7월 19일 동틀 무렵에 적선 1백여 척이 절이도 해상에 급습해 오자, 이순신은 진린의 명 수군으로 하여금 높은 곳에 올라 내려다보게 하였다. 그런 후 조선 수군은 이순신 지휘 하에 절이도 앞 해상의 적을 맞아 싸워서 적선 50여 척을 불태웠다.
절이도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적의 수급 71급을 베었는데, 진린은 후방의 안전지대로 물러나 있음에 따라 아무런 전과가 없었다. 이에 진린이 대노하여 행패를 부리자 이순신은 진린에게 40개의 수급을 보내고 유격 계금에게도 5급을 보내어 이들의 불만을 해소시켰다.
2) 절이도해전의 의미
절이도해전은 명 수군이 참전한 후 최초로 있었던 연합해전이었으며, 조선 수군은 그동안 수군력 재건 결과를 시험한 무대이기도 했다.
명량해전 이후 13척에 불과했던 조선 수군은 고하도와 고금도에서 수군재건에 매진한 결과 60여 척의 전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전력을 보유한 조선 수군이 조•명연합수군과 연합 후 맞닥뜨린 첫 번째 해전에서 대승리를 거둠으로써 이순신의 수군재건이 성공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 해전은 이순신이 지휘한 40여 회의 해전 중 전과 면에서 볼 때 상당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다음 <표4-13>을 통해 비교할 수 있다.
<표4-13> 전과 순으로 본 이순신 지휘 해전일람표
순위 | 해전명 | 교전일자 | 적 세력 | 전 과 |
1 | 노량해전 | 1598.11.19 | 300척 | 200척 분멸 |
2 | 부산포해전 | 1592. 9. 1 | 500척(서전 포함) | 130여 척 분멸 |
3 | 한산도해전 | 1592. 7. 8 | 73척 | 59척 분멸 |
4 | 절이도해전 | 1598. 7.19 | 100여 척 | 50여 척 분멸 |
5 | 명량해전 | 1597. 9.16 | 130여 척 | 31척 분멸 |
6 | 제1차당항포해전 | 1592. 6. 5 | 30척 | 28척 분멸 |
7 | 옥포해전 | 1592. 5. 7 | 30척 | 26척 분멸 |
8 | 안골포해전 | 1592. 7.10 | 42척 | 21척(대선) 분멸 |
9 | 당포해전 | 1592. 6. 2 | 21척 | 21척 분멸 |
10 | 제2차당항포해전 | 1594. 3. 5 | 21척 | 21척 분멸 |
※ 출처: 임진왜란 흥양해전사 연구(2016).
※ 기준: 단일 날짜의 교전기록만 대상으로 하였으며, 전과 면에서 전선 수가 동일할 경우 대선 분멸 척수와 전투 양상을 고려하였음.
위 <표4-13>은 단순히 전과만 고려하여 정리한 것이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절이도해전의 전과는 한산도해전보다 작고 명량해전보다 크다.
절이도해전 승리는 앞으로 전개될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대적 자신감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줄 수 있다. 즉 2개월 후에 벌어지는 사로병진작전 중 예교성의 연합작전에서 조선 수군이 제 몫을 다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다. 또한 명 수군과의 연합작전에서 조선 수군이 제 몫을 다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고, 조선 수군의 위상을 각인시킨 의미 있는 결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조선 수군을 얕보았던 명 수군에게 조선 수군이 강하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는 향후 전개되는 연합작전에서 작전 지휘권을 가진 도독 진린으로 하여금, 조선 수군의 능력을 무시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명군은 천자국에서 제후국을 구원하러 왔다는 우월감으로 인해 조선군을 얕보고 함부로 대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들의 행동에 제동이 걸리면서 조선의 입장이 어느 정도 반영될 수 있었다. 결국 노량해전에서 명군의 적극적인 참전을 유도하여 승리할 수 있게 한 계기가 되었다.
절이도해전에서의 일등공신은 녹도만호 송여종이다. 그는 관할구역인 절이도에서 복병한 후 적선을 분멸시키는 일에 가장 큰 공을 세웠으며, 적선 6척을 사로잡고 적의 수급 70여 급을 획득하였다. 이 해전의 상황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그림4-21]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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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이도해전 상황도 |
참고문헌
1.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 이순신 저, 노승석 역주
2. 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 1권, 2권 이민웅, 정진술, 양진석, 김경숙, 노영구, 이현진, 김남기
3. 임진왜란 흥양해전사 2016 연구 제장명, 고용규, 송은일, 김병륜, 송호철, 윤여석
4. 임진왜란과 흥양수군 2015 연구 제장명, 송은일, 정진술, 신윤호, 한성일, 송철환, 송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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