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흥양수군 800리길

이순신 흥양수군 800리길 5코스

흥양수군 2026. 1. 27. 20:41

이순신 흥양수군 800리길 5코스
 이순신 흥양수군 800리길 5코스는 고라금해수욕장을 출발하여 신양선착장, 우두항, 연소해수욕장, 익금해수욕장, 절이도목장성을 경유하여 적대봉 주차장까지 17km이다.

이순신 흥양수군 800 리길 5 코스는 녹색부분으로서 17km 이다 .

5코스는 고라금해수욕장을 출발하여 예술의 섬 연홍도에 갈 수 있는 신양선착장, 완도군 금당도와 가장 가까운 우두항을 경유하여 아름다운 연소해수욕장에 도착한다.
 
이어서 거금도 둘레길 2코스를 따라 걷다 보면 남해의 오밀조밀한 섬들을 바라볼 수 있고 가는 모래를 자랑하는 익금해수욕장을 거쳐 1466년 점마별감 박식의 주청으로 축성된 절이도목장성을 탐방할 수 있다.

익금 해수욕장


 절이도 목장은 조선시대 국영목장으로서 시산도, 나로도 목장과 함께 도양목장의 속장이었다. 이어서 거금도 북쪽으로 좌측 용두봉과 우측 적대봉 사잇길을 따라 주차장까지 한적하면서 여유 있게 걸을 수 있다.
 
 

5코스-1 고흥 절이도 목장성(전라남도 기념물)

1. 절이도 목장의 연혁
고흥 절이도(折爾島) 목장성(牧場城)은 목장의 말이 울 밖으로 달아나는 것을 막기 위해 절이도에 쌓은 성을 말한다.

절이도 목장성

절이도 목장성은 금산면 금산의 주봉인 적대봉(592m)과 용두봉(419m) 사이에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남쪽의 어전리 금장마을에서 북쪽의 석정리 성치마을까지 이어지며 전체 길이는 4.6km, 폭은 약 2~3m이다.
 
절이도 목장성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466년(세조 12) 사복시(司僕寺)의 점마별감(點馬別監) 박식(朴埴)의 주청으로 축성되었다. 절이도는 주위가 270리로 물과 풀이 풍족하여 말 8백여 필을 방목할 수 있다고 보았다.
 
흥양과 가까이에 있는 회령포‧금갑도‧돌산포‧남도포‧어란포 등 여러 포구의 선군(船軍)을 동원하여 절이도 목장성을 수축(修築)하였다. 이러한 기록으로 절이도 목장성은 약 6백년의 역사성을 담고 있다.
 
1470년(성종 1)에는 절이도에서 364필의 말을 방목하고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는 ‘절이도는 관아의 남쪽 30리에 있고 둘레가 1백리이며 목장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 절이도 목장은 소록도, 시산도, 나로도 목장과 함께 본장(本場) 흥양 도양 목장에 속하는 속장(屬場)이었다.
 
1759년(영조 35) 『여지도서』 흥양현 목장조에 의하면, 목장을 총괄하는 감목관(監牧官) 1명, 군관(軍官) 5명, 목리(牧吏) 27명, 지인(知印) 6명, 사령(使令) 12명, 목자(牧子) 472명의 기록이 있다. 이 목장은 5개소[도양목장, 소록도목장, 절이도목장, 시산도목장, 나로도목장]에 분산되어 있고, 말의 수는 총 353필이었다.

소재지 주위 마수 곡초수 비고
도양목장 주위 15리 말 65필 곡초 3,000속 분양 말 2필을 매년 해당 관청에 상송
소록도 주위 5리 말 37필 곡초 3,000속
절이도 주위 30리 말 116필 곡초 5,000속
시산도 주위 10리 말 72필 곡초 3,000속
나로도 주위 30리 말 64필 곡초 5,000속
합계 90리 353필 19,000속  

 

2. 절이도 목장성의 형태
절이도 목장성의 축조방법을 살펴보면 일반적인 축성 방법과 큰 차이가 없다. 내벽은 먼저 진흙을 이용하여 바닥을 정지한 후 판석형 석재를 이용하여 1단의 기단을 놓고 안쪽으로 10~20cm가량 들어가 그 위에 대형 성돌을 올렸다.
 
대형의 성돌은 비교적 면이 정연한 부분을 바깥쪽으로 하여 쌓였으며, 벽석을 쌓을 때 연속해서 눕혀쌓기를 하였다. 외벽 역시 얇은 판석으로 기단을 조성한 후 10~20cm가량 들어가 그 위에 대형 성돌을 올렸다. 석재의 크기는 상부와 하부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상부로 올라갈수록 그 크기가 줄어든다.
 
그리고 성벽의 면이 정연성이 떨어지고 성돌을 대부분 부정형 할석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빈 공간이 남게 되어 이곳에 쐐기돌을 박아 성벽을 견고하게 하였다. 내외벽 사이는 주변에 많이 있는 할석들을 가득 채웠다. 목장성은 적대봉의 서편을 따라 거의 일직선을 이루고 있는데 적대봉에서 흘러 내려온 많은 할석들이 흩어져 있어서 쉽게 석재들을 구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이 목장성은 그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 있었는데 1970년에 와서 곳곳에 방파제를 축조하면서 이곳의 성석(城石)들을 운반하여 사용함으로써 목장성이 훼손되기 시작하여 현재는 거의 유실되어 버린 구간이 많으며 남아있는 구간 역시 상부는 모두 유실된 상태이다. 그렇지만 금장마을 쪽에 남아있는 구간은 그 원형을 살펴볼 수 있을 정도로 비교적 잘 남아있다.

원형을 살펴볼 수 있을 정도의 절이도 목장성


 절이도 목장성은 조선시대 초기에 축성된 흔치 않은 목장성이며, 축성시기 등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등 역사적 그리고 학술적 가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