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흥양수군 800리길 9코스
이순신 흥양수군 800리길 9코스는 사덕마을을 출발하여 발포진, 충무사, 굴강, 발포역사전시체험관, 발포해수욕장, 남성마을을 경유하여 나로대교준공기념탑까지 17km이다.

9코스는 도화면 사덕마을을 출발하여 5km 정도 걸으면 1580년 9월부터 1582년 2월까지 이순신 장군이 수군 만호로로 근무하였던 발포진에 이르게 된다.
위쪽으로 이순신 장군 영정을 모신 충무사가 있고 아래쪽에는 선소였던 굴강이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고 있다. 바로 인근에 발포역사 전시체험관과 임진왜란 당시 만호였던 황정록의 송씨부인 동상도 있다.
이어서 발포해수욕장, 남성마을을 경유하여 나로대교 준공기념탑에 이르게 된다.
9코스-1 발포진(鉢浦鎭)
발포진은 1439년(세종 21) 4월에 녹도진과 발포 사이에 있던 소흘라량진이 폐지되면서 설치된 것으로 확인된다.

발포진은 1479년(성종 10) 1월에 내례포진이 전라좌수영으로 승격되면서 전라좌수영 사도진관(蛇島鎭管)에 편제되었다. 이러한 편제는 발포진이 1895년 7월 공식적으로 폐지될 때까지 줄곧 유지되었다.
발포진성은 1485년(성종 16) 3월에 그 규모가 결정되었다. 사도순찰사(四道巡察使) 홍응의 보고에 따르면 남향이고 둘레가 1,360척, 동서 길이가 400척, 남북 너비가 180척, 높이가 13척이며 보 안의 샘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5년 반이 지난 1490년(성종 21) 윤 9월 말에 완공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1592년 2월 23일 발포진에 이르자 역풍이 크게 불어 성두에 간신히 배를 대었고, 배에서 내려 말을 탔으나 비가 많이 쏟아져 일행 모두는 꽂비에 젖은 채 도착했다. 수군과 무기 상태를 보고받은 후 준비 상태가 양호한 편이어서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았다.
난중일기에 발포(鉢浦)는 5회 언급되었고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난중일기 1592년 2월 23일(갑인) 흐림.
늦게 배를 출발하여 발포[鉢浦]에 이르자 역풍이 크게 불어 배가 갈 수 없었다. 간신히 성 근처에 대었고, 배에서 내려 말을 탔다. 비가 몹시 쏟아져 일행 상하가 모두 꽃비에 젖은 채 발포에 들어서니 해는 이미 저물었다.
나대용(羅大用, 1556년~1612년): 임진왜란 당시 발포진 권관
나대용은 조선 중기의 무관이며, 거북선의 건조와 병기류 제조에 기여하였다. 과거 급제 후 교동수사에 이르렀다. 본관은 금성(錦城)이다.
전라도 나주 출신으로 1556년 첨추(僉樞) 나항(羅亢)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래 문장이 뛰어나 문인이 되려 하였으나, 1583년(선조 16년) 훈련원 별시에 병과 급제하여 훈련원봉사를 지냈다.
1591년 전라좌수사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 병선 연구에 힘썼는데 특히 거북선을 건조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1592년 옥포해전에서 유군장 직을 맡아, 적의 대선 2척을 격파하였다.
사천해전에서는 분전 끝에 총탄을 맞아 부상을 입고, 한산도 해전에서도 부상을 당하였다. 명량해전과 1598년 노량해전에도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이와 같은 공을 인정받아, 1594년 강진현감으로 제수되었고, 이어 금구, 능성, 고성의 현감을 역임하였다.
1606년 12월 24일 나대용은 선조에게 상소를 올려 창선을 개발하였다고 한다. 전투형 거북선과 탑승인원이 많이 필요한 판옥선의 단점을 보완하여, 칼과 창을 빽빽이 꽂은 창선을 건조한다.
125명이 필요한 판옥선에 비해 격군 42명으로도 배의 운용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기존 인력으로 2배의 배를 운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1] 1610년 광해군 2년에는 남해현령에 제수되었고, 해추선(海鰍船)이라는 쾌속선을 고안하여 건조하였다.
1611년에는 경기수군을 관할하는 교동수사에 제수되었으나, 전쟁에서의 부상이 재발하여 부임하지 못하고 1612년 1월 29일에 사망했다.
-다음 백과-
황정록: 임진왜란 당시 발포진 만호
본관은 장수(長水). 아버지는 동래도호부사 황박(黃博)이다. 조선시대 덕원부사, 강계부사, 원주목사 등을 역임한 무신.
문음을 통해 정계에 진출하여 1581년(선조 14) 기장현감에 제수되었지만, 수령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체직되었다.
이후 발포만호를 거쳐 1600년(선조 33)에 전라우수사에 올랐으나, 역시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임무를 감당할 만한 인물이 아니다.”라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다시 체차되었다.
그 뒤 용천군수·황해도병마절도사·덕원부사·강계부사·원주목사를 지냈다. 그러다가 광해군 초년 70세에 가까운 나이로 북관과 영동의 요해처인 간성(杆城)에 조방장(助防將)을 겸한 군수에 제수되어 거의 평생 동안 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다음 백과-
난중일기에 발포만호 황정록은 13회 언급되었고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난중일기 1594년 2월 15일(갑자) 맑음.
새벽에 거북선 2척과 보성 배 1척을 가목 벌목하는 곳으로 보내서 초경[오후7~9시]에 실어 왔다. 식후에 활터 정자에 올라가 좌조방장이 늦게 온 죄를 추궁했다. 흥양 배를 검열하니 허술한 점이 많았다.
순천부사, 우조방장, 우수사우후, 발포만호[황정록], 여도만호, 강진현감 등이 함께 와서 활을 쏘았다. 날이 저물어 순찰사[이정암]가 보낸 공문이 왔는데, “조도어사 박홍로가 순천·광양·두치에 복병을 배치하고 파수하는 일로 장계를 올렸는데, ‘수군과 수령을 함께 이동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대답이 내려오고, 공문도 함께 왔다.”는 내용이었다.
9코스-2 충무사(忠武祠)
충무사는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다.

이 사당은 1580년[선조 13] 9월 이순신 장군이 36세 때에 이곳 발포만호로 부임하여 1582년[선조 15] 1월까지 16개월간 재임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들었다.
이 충무사는 1976년 충무공 유적 고흥보존위원회(49명)를 구성하여 발포만호진성[도제산]의 남측 기슭이고, 성곽의 북벽 바깥에 인접한 경사자에 범 군민사업으로 교육을 강화하려고 1976-1980년 5년간에 걸쳐 건립하였다.
이 충무사의 전체 면적은 4,335평이고 중요시설물은 영정을 모신 사당[13평]을 비롯하여 내삼문, 외삼문 등이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충무공 보존 위원회 주관으로 충무공 탄신일인 4월 28일에 충무공 탄신제를 거행하고 있다.
- 충무사 간판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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