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흥양수군 800리길 1코스
이순신 흥양수군 800리길 1코스는 조선시대 고흥군을 뜻하는 흥양현을 출발하여 운곡사, 고흥 무열사, 김붕만신위단비까지 18km이다.

고흥군청이었던 흥양현읍성에서는 1445년에 완공된 읍성, 고흥아문, 존심당, 남휘루 등을 탐방할 수 있고, 고흥읍 호동리에 있는 운곡사에서는 고흥류씨, 여산송씨, 남양송씨, 압해정씨 등의 인물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두원면 신송리에 있는 고흥 무열사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사도진 군관이었던 진무성 장군의 활동 사항을 살펴볼 수 있고, 두원면 예회리에 있는 김붕만 신위단비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사도진과 전라좌수영 군관이었던 김붕만 장군의 활동 사항을 탐방할 수 있다.
1코스-1 흥양현(興陽縣)
흥양현은 1441년(세종 23) 2월에 지금의 읍성 자리에 터를 잡은 후, 읍성은 1445년(세종 27)에 축조되었다. 둘레는 3,500척(1636m)이고 샘이 5개가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1592년 2월 20일 흥양현을 순시 중 경치에 취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늦게 출발하여 영주에 이르니 좌우의 산꽃과 교외의 봄풀이 그림과 같았다. 옛날에 있었다던 영주(瀛州, 중국 전설에 나오는 삼신산 중 하나인 영주산을 일컬음)도 역시 이와 같은 경치였던가!’
난중일기에 흥양은 모두 21회 언급되었고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난중일기 1593년 6월 22일(을사) 맑음.
처음으로 전선을 만들기 위하여 자귀질을 시작했다. 목수 214명이 일을 하였다. 본영에서 72명, 방답에서 35명, 사도에서 25명, 녹도에서 15명, 발포에서 12명, 여도에서 15명, 순천에서 10명, 낙안에서 5명, 흥양과 보성에서 각 10명이었다.
방답에서 처음에는 15명밖에 보내지 않아서 담당한 군관과 아전을 처벌하였는데 그 정상이 아주 간교하였다.
본영 제2호선[우후선]의 무상 손걸을 본영으로 돌려보냈는데, 못된 짓을 많이 저질러서 가두었다기에 붙잡아 오라고 하였더니, 이미 들어와 인사를 하는 것이므로 제 마음대로 드나든 죄를 다스리고, 그와 함께 우후의 군관 유경남도 처벌하였다. 오후에 가리포첨사가 왔다.
적량의 고여우와 이효가도 왔다. 저녁 때 소비포권관 이영남이 보러 왔다. 초경[오후 7~9시]에 영등 탐망군이 와서 보고하되, “별다른 소식은 없고 다만 적선 2척이 온천[칠천도]으로 들어가기에 순찰하여 정탐하고 돌아왔다.”라고 하였다.
배흥립(裴興立, 1546~1608) 임진왜란 당시 흥양현감1
배흥립의 자(字)는 백기, 본관은 성주로 한성에서 살았다. 현감 배인범의 아들로 1546년(명종 1)에 나니 이순신보다 한 살 아래이다.
1572년(선조 5)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주부를 거쳐 결성·장흥 등 고을 원을 지냈으며, 1592년(임진년)에 흥양현감으로서 좌수사 이순신의 막하로 여러 해전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1596년 장흥부사가 되었다가 얼마 후 파직되었으며, 1597년(정유년) 칠천량 해전에는 조방장으로 참가하여 패전하였으나 몸만 빠져나와 통제사로 재 부임한 이순신과 합세하였다.
1597년 명량 해전과 1598년 노량 해전에 조방장으로 참가하여 전공을 세우고 가의대부(종2품 상)로 승진하였다.
1600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이듬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604년에 무인 출신으로는 드물게 공조참판이 되었다. 이어서
충청도 수군절도사와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고종 때 좌찬성을 증직하고 효숙이라 시호하였다.
-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 2권 105쪽-
황세득[黃世得 1537~1598]:임진왜란 당시 흥양현감 2
자는 사구, 본관은 성주, 충청남도 직산에서 살았다. 이순신의 처종형으로 1537년[중종 32]에 났으니 이순신보다 8세 위다.
1564년[명종 19]에 무과에 급제하여, 1594년[선조 27] 7월에 흥양현감에 부임하여 1595년[선조 28년] 2월에 파직되었다.
1596년[선조 29]에 사도첨사가 되어 통제사 이순신의 휘하가 되었다. 1598년[선조 31] 9월 왜교 전투에서 힘써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1704년[숙종 30] 직산읍 선비들의 상소로 시호 충장공과 함께 호조참판을 증직하였으며, 정려문을 하사하였다. 오늘날 성주황씨의 시조이며, 1988년 신도비를 묘역에 세웠다.
홍유의(洪有義, 1557~) 임진왜란 당시 흥양현감 3
홍유의의 자(字)는 의로, 본관은 남양. 거주지는 한성이다. 1557년(명종 12)에 났으니 이순신보다 12년 아래다. 1589년(선조 22)에 증광시 생원 2등 22위로 합격하였으며, 임진왜란 후 무과시험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관직은 흥양현감, 의성현감, 만포첨사, 안변부사 및 충청도·전라도 병마절도사, 제주목사 등을 역임하고, 1615년(광해군 7)에 종성부사를 지냈다. 홍유의는 흥양현감으로 1595년 3월부터 1597년 6월까지 2년 3개월동안 재임하였다.
-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 2권 340쪽-
최희량(崔希亮, 1560~1651) 임진왜란 당시 흥양현감 4
최희량의 자(字)는 경명, 호는 일옹, 본관은 수성. 전라남도 나주에서 살았다. 승지 최낙궁의 아들로 1560년에 나니 이순신보다 15세 아래다.
일찍 일정 최학령 문하에서 경사를 배우다가 27세에 붓을 던지고 무예를 배웠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1595년(을미)에 무과에 급제하여, 당시 충청 수사로 있던 장인 이계정을 돕도록 천거되어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1597년(정유) 7월부터 흥양현감에 발탁되어 육지의 전투에서 여러 번 전공을 세웠으나, 1598년 8월에 전라병사 이광악의 장계로 파직되어 향리로 돌아왔다.
1604년 논공에서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고, 가선대부에 올랐다. 병자호란 때에는 이미 나이가 많아서 출전하지 못하고 대신 아들을 보내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하게 하였다.
저서로는 『일옹문집』 2권 1책이 있다. 1774년(영조 50)에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1800년(정조 24)에 나주 향인들이 지은 사당에 이순신과 함께 배향되었다. 시호는 무숙이다. 「崔希亮壬亂關聯古文書」 보물 제680호
-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 2권 288쪽-
고득장(?~1598) 임진왜란 당시 흥양현감 5
고득장은 1598년 9월부터 11월까지 흥양현감으로 재임하다가 순천왜성 전투에 참가하였고,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다.
1코스-2 운곡사(운곡사)
고흥읍 호동리에 있는 운곡사에서는 고흥류씨, 여산송씨, 남양송씨, 압해정씨 등의 인물 등을 살펴볼 수 있다.
1코스-3 고흥무열사(진무성)
진무성(陳武晟)의 자(子)는 사규(士赳), 호는 송계, 본관은 여양, 전라남도 흥양(고흥)에서 살았다.
고려 때의 한림학사 진화 후손이며 증참판 진인해의 아들로 1566년(명종 21)에 나니 이순신보다 21년 아래다. 임진왜란 때 보인의 신분으로 사도첨사의 군관이 되었다.
1592년 당포 해전에서 적장이 화살에 맞고 물에 떨어지자 그의 목을 베는 공을 세웠으며, 적의 화살에 부상당하기도 했다.
특히, 1593년(선조 26, 계사) 진주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진주가 포위되었다는 말을 듣고 이순신이 그 정황을 탐색할 자를 찾을 때, 진무성이 자청하여 나서서 죽음 속을 뚫고 성 안에 다녀오는 임무를 완수함으로써, 그 용맹과 지혜가 드러났다.

1597년 칠천량 해전에서는 홀로 화공으로 적선을 무찌르기도 했으나 대세를 어찌할 길이 없었다. 전쟁이 끝난 다음 해인 1599년(기해)에 무과에 급제하고, 뒤에 선무원종공신에 참록되었으며, 유원첨사와 경흥부사, 통제영 우후, 구성부사를 역임하였다. 죽은 뒤에 호조판서에 추증되고, 고흥의 용강사에 제향되었다.
-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 2권 280쪽-
난중일기에 진무성 2회 언급되었고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난중일기 1596년 윤8월 10일(갑술) 맑음.
새벽에 무과 초시를 시작하였다. 면이 쏜 것은 모두 55보, 봉이 쏜 것은 모두 35보, 해가 쏜 것은 모두 30보, 회가 쏜 것은 모두 35보, 완이 쏜 것은 모두 25보라고 했다. 진무성이 쏜 것은 모두 55보로 합격되었다.
저물녘에 우수사[이억기]와 경상수사[권준], 배 조방장[배흥립]이 함께 왔다가 이경[오후 9-11시]에 헤어져서 돌아갔다.
1코스-4 김붕만(金鵬萬) 신위단비
김붕만은 현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 예회마을 출신으로 자는 봉서, 본관은 김해. 무과에 합격하여 벼슬이 제주 판관에 이르렀다.
1592년에 사도첨사 김완의 군관으로 부산 해전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은 바 있다. 1593년 6월 진주 함락 직전 전황을 정찰하여 한산도의 이순신에게 보고하는 등 전란 중 상당 기간을 이순신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참록되었고, 금산 금곡사에 제향되었으며, 약재 송병화가 그의 묘비문을 지었다.
-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 2권 399쪽-

부산파왜병장: 사도1선의 군관 김붕만은 철환을 맞았으나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난중일기에 김붕만은 모두 6회 언급되었고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난중일기 1593년 6월 26일(기유) 큰 비가 내리고 남풍이 크게 불었다.
저녁 때 김붕만(金鵬萬)이 진주로부터 적의 형세를 정탐하고 와서 아뢰되, “무수한 적의 무리가 진주 동문 밖에 모두 진을 쳤는데, 큰비가 연일 와서 물에 막혔으며 거리낌 없이 독기를 내어 싸우고 있다.
그러나 지금 큰물이 적진을 휩쓸려고 하니, 적이 밖으로 군량과 지원군을 댈 수 없으니, 만일 큰 부대가 합력해서 친다면 대번에 섬멸할 수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미 양식이 끊어졌으니, 우리 군사는 편안히 앉아서 고달픈 적을 맞게 되는 것으로 그 형세가 백전백승을 기약할 수 있다. 하늘이 또한 순조롭게 도와주고 있으니, 수로의 적이 비록 모두 500-600척 일지라도 우리 군사를 당해 낼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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