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흥양수군 800리길 12코스
이순신 흥양수군 800리길 12코스는 옥강교차로를 출발하여 해창만 간척지 농로길을 따라 5km 정도 걸어서 정걸 장군 사당인 안동사를 탐방한다. 다시 해창만 간척지 농로길을 따라 걸어서 영남면 사도진까지 17km이다.

12코스는 옥강교차로를 출발하여 15번 국도를 따라 2km 정도 걷다가 우회전하여 해창만 농로길을 따라 3.5km 정도 걸어가면 정걸 장군 영정을 모신 안동사에 도착한다.
이곳에는 정걸 장군과 아들 정연 군수, 손자인 정홍록 군수의 각종 유물이 보관된 장소이다. 관리가 잘되지 않아 이곳을 들린 사람들마다 매우 안타까워한다.
이어서 다시 해창만 간척지 농로길을 따라 6.5km를 걸으면 해창만 캠핑장에 이른다. 중국집과 식당이 있는 꽤 큰 캠핑장이다. 계속해서 해창만제방길을 따라 3.5km 정도 걸어가면 사도진에 이른다.

12코스-1 안동사(鴈洞祠, 정걸사당)


12코스-2 사도진(蛇渡鎭)
사도진은 1427년(세종 9) 7월 여자만 입구에 위치하고 있어 적이 다니는 요해지로서의 가치가 인정되어 처음 설치되었다.

1425년(세종 7) 2월에 순천 용문포에 있던 전라좌도 도만호진의 기능을 물려받아 여자만에 설치되었던 여도진이 지리적인 입지로 인해 방어기능이 떨어짐에 따라 이를 보완하기 위해 요충지인 여자만의 입구에 사도진을 설치한다. 마북산 봉수와 수덕산 봉수를 설치하여 왜구에 대한 감시 기능을 한층 강화하였다.

사도진은 처음 설치 당시에는 고흥현에 속했고 1441년(세종 23) 흥양현의 설치와 함께 흥양현 소속으로 바뀌게 되었다. 1479년(성종 10) 1월에 내례진이 전라좌수영으로 승격되면서 전라좌수영 휘하의 종3품 사도첨절제사진으로 편제되었다.
이러한 편제는 1895년 7월 공식적으로 폐지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사도진성은 둘레 1,440척, 남북 길이 400척, 동서 너비 1,000척, 보 안의 샘 두 곳이 있었다. 전라좌수영 관내 7개의 수군진성은 1490년(성종 21) 4월부터 1491년(성종 22) 10월까지 2년간에 걸쳐서 축조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1592년 2월 24일 비를 맞으며 길을 떠나 마북산 밑 사량에서 배를 타고 사도진에 도착하였다.
흥양 현감 배흥립과 함께 사도진을 점검한 후 전쟁 준비가 제대로 갖추어진 것이 거의 없음을 확인하고 수군진의 관리들에게 벌을 준 뒤 지휘관이었던 첨사 김완을 잡아들였으며, 김완의 바로 아래 관리를 파직시켰다.
그리고 역풍이 크게 불어 배가 떠날 수 없으므로 다음날(1592년 2월 25일) 방답진으로 떠났다.
난중일기에 사도[蛇渡]는 모두 5회 언급되었고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1592년 2월 24일(을묘) 맑음.
가랑비가 산에 가득하여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비를 맞으며 길을 떠나 마북산 밑 사량에 이르러서 배를 타고 노질을 재촉하여 사도[蛇渡]에 이르니 흥양현감이 벌써 와 있었다. 전선을 점고하고 나니 날이 저물었으므로 그대로 머물러 잤다.
김완(金浣, 1546~1607): 임진왜란 당시 사도진 첨사 1
김완의 자(字)는 언수, 호는 사성당, 본관은 경주이다. 1577년(선조 10)에 무과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는 사도첨사로서 옥포, 당포 해전에서는 우척후장, 한산 해전에서는 척후장으로 공을 세워 절충장군(정3품)에 올랐다.
정유년(1597년)에는 원균의 조방장으로 활약했으나 불행히 패전하고 물에 빠져 헤엄치다가 적에게 붙들리어 일본에까지 사로잡혀 갔었다.
그 후 갖은 굴욕에도 항복하지 않고 마침내 적의 소굴을 벗어나 도망해 돌아왔는데 양산군수 박응창이 그 사연을 들어 장계하였던 바 순찰사가 그 곡절을 심문하고 조정에 장계하여 진중에 있도록 하니 위에서도 허락하였다.
-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 2권 27쪽-
난중일기에 김완[金浣]은 사도첨사와 조방장 역할로서 모두 50회 언급되었고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1596년 6월 7일(을사) 맑음.
적선을 탐색하기 위해 아침에 떠나 영등 앞바다에 이르러 적선이 율포에 있다는 말을 듣고 복병선을 시켜 가 보게 했더니, 적선 5척이 먼저 우리 수군을 알아채고 남쪽 넓은 바다로 바쁘게 달아났다.
우리 여러 배들이 일제히 뒤를 쫓아 사도첨사 김완이 한 척을 통째로 잡고, 우후 이몽구도 1척을 통째로 잡았으며, 녹도만호 정운도 1척을 통째로 잡았다. 왜적의 머리는 합하여 모두 36급이었다.
황세득[黃世得 1537~1598]:임진왜란 당시 사도진 첨사 2
자는 사구, 본관은 성주, 충청남도 직산에서 살았다. 이순신의 처종형으로 1537년[중종 32]에 났으니 이순신보다 8세 위다. 1564년[명종 19]에 무과에 급제하여, 1594년[선조 27]에 장흥부사, 1596년[선조 29]에 사도첨사가 되어 통제사 이순신의 휘하가 되었다.
1598년[선조 31] 9월 왜교 전투에서 힘써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1704년[숙종 30] 직산읍 선비들의 상소로 시호 충장공과 함께 호조참판을 증직하였으며, 정려문을 하사하였다. 오늘날 성주황씨의 시조이며, 1988년 신도비를 묘역에 세웠다.
난중일기에 사도첨사 황세득이 모두 5회 언급되었고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난중일기 1597년 6월 12일(신미) 맑음.
이른 아침에 종 경과 인을 한산진으로 보냈다. 전라우수사[이억기], 충청수사[최호], 경상수사[배설], 가리포첨사[이응표], 녹도만호[송여종], 여도만호[김인영], 사도첨사[황세득], 배 동지[흥립], 김 조방장[완], 거제현령[안위], 영등포만호[조계종], 남해현령[박대남], 하동현감[신진], 순천부사[우치적] 등에게 편지했다.
늦게 승장 처영이 보러 왔는데, 둥근 부채와 미투리[삼으로 삼은 짚신]를 바치므로 다른 물건으로 갚아 주어 보냈다. 그는 적의 정세도 이야기하고, 원 공[균]의 일도 이야기했다. 낮에 들으니 중군장[이덕필]이 군사를 거느리고 적에게로 나아갔다고 한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원수에게 가 본즉, 우병사[김응서]의 긴급 보고에 “부산의 적은 창원 등지로 떠나려 하고 서생포의 적은 경주로 진을 옮긴다.”라고 하여, 복병군을 보내서 길을 막고 군대의 위세를 과시한다고 했다. 병사의 우후 김자원이 일이 있어서 원수를 뵈러 왔다. 나도 그를 만나고 달빛을 이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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