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흥양 수군의 탄생과 변천
1) 흥양 수군의 탄생
고려말부터 수군의 제도적인 정비가 시작되었고 선군 또는 기선군으로 불렸다.
조선초 흥양은 왜구를 방비하기 위하여 1397년 고흥현에 6진이 설치되었고, 왜적이 침입할 수 있는 길목이라는 점과 병선을 정박할 수 있는 적합한 포구가 있었다는 점 등이 고려되어 일찍부터 수군기지가 들어서게 되었다. 녹도만호가 사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1406년의 일이었고 축두만호진은 1430년의 일이지만 1396년 말경에 이미 전국적으로 군선이 배치되어 있었다는 것과 이후 1398년에는 만호, 천호, 백호 등 수군직의 품계를 설정하였던 것을 보면 늦어도 1398년 이전에 녹도만호진과 축두만호진이 설치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즉, 현 고흥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던 수군진은 녹도만호진과 축두만호진이었다.
1425년 여도 도만호 수군진이 설치되었는데, 1427년 여도 도만호진은 사도로 옮겨지게 된다. 그 이유는 사도가 여도보다는 먼바다 쪽으로 나와있기 때문에 왜구를 미리 방어할 수 있으며, 조수간만의 차이가 적고 바다가 깊어서 배들이 항상 출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435년(세종 17) 7월에 정식 만호진이 설치되었던 소흘포가 방어에 적합하지 않아 1439년 발포수군진을 설치하게 되었다.
이전까지 군익도체제였던 지방군제가 1457년 진관체제로 변화하면서 육군과 수군의 편제 변화에 따라 사도가 여도를 대신하여 전라좌도 도만호 수군진으로 전환되어 첨절제사라는 지휘관이 파견되었다.
2) 흥양 수군의 변천
수군은 조선이 건국된 직후 태조 초부터 각 도별로 수군도절제사와 수군첨절제사 등에 의하여 통솔되었다. 1398년(태조 7)에는 수군도절제사와 수군첨절제사 휘하에 만호(3품 이하), 천호(4품 이상), 백호(6품 이상) 등을 두어 품계를 결정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전라도 수군은 수군처치사 지휘아래 현 고흥군 점암면 여도리에 위치해 있었던 좌도 도만호가 있었고 이 도만호 지휘 아래 8인의 만호가 있었는데, 이 만호 중에는 축두만호와 녹도만호가 존재해 있었다.
조선초기 지방군사체제는 세조 초에 획기적으로 개편되면서 지방의 주요 지역을 중심으로 거점을 두고 중‧좌‧우익의 편제로 방어체제를 구축하여 나갔다. 이러한 방어체제는 이미 조선 초 북방지역인 평안도와 함경도에 사용되었던 군익도체제인데, 이 시기에 전국적으로 확대된 것이다. 1457년에는 진관체제로, 1555년 을묘왜변 이후에는 제승방략체제로 변화를 거듭하였다.
군익도체제(軍翼道體制)
조선 초기 영진(營鎭) 중심의 방어체계를 행정상의 각 도를 몇 개의 군익도(軍翼道)로 나누고, 군익도마다 거진을 설치하여 이를 좌익•중익•우익의 3익(翼)으로 나누었고, 군익체제가 불편한 곳은 별도로 독진(獨鎭)을 두는 이원체제를 갖추었다.
진관체제(鎭管體制)
각각의 여러 진들에게 독자성을 부여하고 일원적인 군사지휘체계를 더욱 분명히 하고자 한 조치였다.
육군은 지방행정 단위인 읍 자체를 군사조직 단위인 진으로 편성하여 각 읍의 수령으로 하여금 군 지휘관으로서의 임무를 겸하게 하였다.
수군은 행정구역과 관련시키지 않고 연해지역 중요지역에 설치된 수군진만을 묶어 진관조직으로 편제하였다. 수군절도사• 우후•수군•첨절제사•만호 품계 편제
제승방략체제(制勝方略體制)
1555년 을묘왜변 이후 한 도(道)의 군사들을 순변사, 방어사, 조방장, 병사, 수사 등에게 분속시킨 군사체제이다. 이 과정에서 해상 방어를 위한 병력이 많이 배치된 연해 지역의 군현들은 전략적인 효율성을 위하여 수사의 절제를 받게 되었다.
1555년 을묘왜변의 계기로 방어체계가 진관체제에서 제승방략체제로 바뀌면서 전라좌수사는 관할 수군진뿐만아니라 연해지역 각 읍에까지 수군기지를 설치하여 수군의 훈련과 군선 관리 등에 대한 권한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라좌수영의 관할 지역은 기존의 수군진이었던 사도진, 방답진, 여도진, 녹도진, 발포진, 회령포진 뿐만아니라 주변 고을인 순천부, 낙안군, 보성군, 흥양현, 광양현, 장흥부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1460년 축두만호진이 폐지되고 사도첨절제사가 회령포, 달량, 마도, 녹도, 발포, 여도, 돌산포의 전라좌도 7개의 만호진을 관장하게 되었다.
1479년 여수에 전라좌수영, 해남에 전라우수영이 설치되었고 전라좌수사와 전라우수사가 배치되었다.
1522년 6월 추자도에 왜구가 칩입하자 완도 가리포에 달량만호진과 마도만호진을 옮겨 받아 첨절제사진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돌산포만호진을 폐지하고 대신 방답첨사진이 설치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판옥선에는 사부(射夫)와 격군(格軍)을 합쳐 130명 가량이 탑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