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을 조사해 보니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으로 나타났다. 우리 국민으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이순신 장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23전 23승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해군 제독으로서 군수품을 조달하고 전선(판옥선과 거북선)을 확보하여 군사를 양성하며 전투력을 향상시키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와 같은 탁월한 능력에 의병과 호남지역 사람들의 적극적인 군수품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은 더욱 더 빛날 수 있었다. 호남 사람들의 적극적인 군수품 지원 속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도양•도덕에서 도양장道陽場이라는 이름으로 지원한 군량미가 있었다’고 난중일기에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 1595년 2월 13일 도양道陽의 둔조(屯租) 3백 섬을 싣고 와서 각 포구에 나누어 주었다.
- 1595년 6월 6일 송희립(宋希立)이 들어왔다. 그 편에 도양장道陽場의 농사 형편을 들으니, 흥양 현감(홍유의)이 심력을 다 했기에 가을 추수의 희망이 많다고 했다. 계원유사 임영(林英)도 애를 쓴다고 했다.
- 1595년 9월 3일 강응호(姜應虎)가 도양장의 추수할 일로 함께 돌아갔다.
- 1596년 6월 1일 윤연(尹連)이 자기 포구로 간다고 하기에 도양장道陽場의 종자콩이 부족하면 김덕록(金德祿)에게서 가져가도록 체자(帖子, 증명서)를 써 주었다.
- 1595년 11월 13일 도양장道陽場에서 거둔 벼와 콩이 8백 2십 섬이었다.
- 1596년 윤8월 19일 녹도鹿島로 가는 길에 도양道陽의 둔전屯田을 살펴보았다. 체찰사(이원익)는 얼굴에 희색이 만연했다. 녹도에 도착하여 잤다.
- 1597년 10월 30일 저녁에 양밀(梁謐)은 도양장道陽場의 둔전(屯田) 곡식을 멋대로 나누어 준 일로 곤장 60대를 쳤다.
임진왜란 당시 도양장道陽場에서 생산한 군량미를 조선수군에게 가장 많이 제공함으로써 도양장은 이순신 조선수군의 막강한 전투력 향상에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 먹어야 훈련도 하고 전투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군수품이 군량미였다. 이렇게 중요한 군량미를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 수십 번 언급하였다. 특히 도양장 군량미에 관한 기록이 가장 많이 언급(난중일기에 12일치, 장계 2회)되었던 것은 조선 수군을 지휘하고 유지하는데 도양장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곳에 ‘가칭 이순신 군량미 소공원’을 조성하여 도양장道陽場을 방문한 역사 탐방객들에게는 임진왜란 군량미 공급처로서 사실을 알리고, 지역민들에게는 차원 높은 역사적인 자부심을 심어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가칭 이순신 군량미 소공원’에는 잔디와 나무 2-3그루 심고 다음과 같은 ‘도양장道陽場’ 표지석을 설치하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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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고흥군 도양읍 관리 관중마을 |
도양장道陽場은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 표현한 둔전 이름이다. 도양장道陽場의 구체적인 지역은 오늘날 도양읍과 도덕면 일대이고 임진왜란 때 부족한 군량미를 생산하기 위해 전라 좌도에 돌산도와 도양장, 전라 우도에 화이도와 황원곶에 둔전을 설치하였다.
난중일기에서 도양장 관련 내용이 12일이나 기록되었다. 군량미 생산량뿐만아니라 군량미 생산에 필요한 씨앗에서부터 노동력을 절감해 주는 쟁기를 끄는 소, 흥양현감 홍유의의 도양장 둔전 관리 노력 정도, 군량을 지원해 주는 계원유사 임영의 활동, 추수철이면 군사를 동원했던 내용, 도양장에서 생산한 군량미를 한산도 각 부대에 공급했던 일, 도양장 둔전관 이기남과 이기윤 형제의 도양장으로 복귀한다는 신고 인사, 군량미를 임의로 배급한 관리를 징계한 내용과 당시 최고 책임자였던 이원익과 함께 직접 도양장을 시찰하고 매우 만족스러운 내용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 장군은 기아와 전염병을 극복하고 수군 전투력 향상을 위해 부족한 군량미 생산에 새로운 개념의 둔전 경영 아이디어를 창안하여 임금님께 장계도 올렸으며 윤허도 받아서 이곳에 도양장道陽場을 설치하였다.
다른 지역 표지석 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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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아산시 인주면 해암리 게바위 소공원 | 충남 아산시 효의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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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안양시 인덕원 터 | 전남 구례군 조선수군출정공원 |
난중일기 속 도양장道陽場 관련 기록
♥ 난중일기 1594년 8월 29일(갑술) 맑으나 북풍이 크게 불었다.
공무를 보았다. 아침에 마량첨사와 소비포권관이 와서 함께 밥을 먹었다. 늦게 활터 정자에 옮겨 앉아 서류를 처결해 보냈다. 도양道陽의 목동 박돌이의 죄를 다스렸다. 도둑 3명 중 장손은 장(丈) 백 대를 때리고 얼굴에 도(盜)자를 먹물로 들였다. 남해현감이 들어왔다 의병장 성응지가 세상을 떠났다. 참으로 슬프다.
♥ 1595년 2월 13일(병진) 맑음.
일찍 대청에 나가고 도양道陽의 둔조(屯租) 3백 섬을 싣고 와서 각 포구에 나누어 주었다. 우수사(이억기)와 진도군수(박인룡), 무안 현감, 함평 현감(조발), 남도포 만호(강응표), 마량 첨사(강응호), 회령포 만호(민정붕) 등이 들어왔다.
둔조(屯租)는 둔전이나 둔답을 경작하는 이가 조세로 부과하는 벼이다. 둔세(屯稅)와 같음.
♥ 1595년 6월 6일(정미) 종일 비가 내렸다.
몸이 몹시 불편하였다. 송희립(宋希立)이 들어왔다. 그 편에 도양장道陽場의 농사 형편을 들으니, 흥양 현감(홍유의)이 심력을 다 했기에 가을 추수의 희망이 많다고 했다. 계원유사 임영(林英)도 애를 쓴다고 했다. 정항(鄭沆 진해 현감)이 이곳에 왔으나, 나는 몸이 불편하여 온종일 조금 앓았다.
♥ 1595년 8월 13일(계축) 종일 비가 내렸다.
장계 초본을 쓰고 공문을 작성하였다. 독수(禿水)가 왔는데, 그 편에 도양장道陽場 둔전에 대한 일을 들었다. 이기남(李奇男)이 하는 짓에 괴상함이 많음으로 우후에게 달려가 죄상을 조사하도록 공문을 만들어 보냈다.
♥ 1595년 9월 1일(경오) 맑음.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탐후선이 들어왔다. 우후(이몽구)가 도양장道陽場에서 와서 본영의 공문을 바쳤는데, 사립(思立, 정사립)을 해치려는 뜻이 많이 있으니 가소롭다. 종사관(유공진)이 병가를 내고 돌아가서 조리하고자 하므로 결재해 보냈다.
♥ 1595년 9월 3일(임신) 맑음.
동풍이 크게 불었다. 아우 여필(汝弼, 이우신)과 아들 울(蔚), 유헌(有憲, 변유헌)이 돌아갔다. 강응호姜應虎가 도양장道陽場의 추수할 일로 함께 돌아갔다. 정항(鄭沆), 우수(禹壽), 이섬(李暹)이 정탐하고 들어왔는데, “영등포에 있는 적진은 초이틀에 소굴이 비게 되고 누각과 모든 소굴들이 다 불타버렸다.”고 했다. 웅천에서 적에게 투항하여 붙었던 사람 공수복(孔守卜) 등 17명을 달래서 데려왔다.
♥ 1595년 11월 13일(신사) 맑음.
도양장道陽場에서 거둔 벼와 콩이 8백 2십 섬이었다.
♥ 1596년 병신년(친필 일기의 일기 외 기사)
도양장에서 농사에 부리는 소가 7마리인데, 보성(寶城)의 임정로(林庭老)가 1마리, 박사명(朴士明)이 1마리를 바치지 않았다.
♥ 1596년 6월 1일(정유) 궂은 비가 종일 내렸다.
늦게 충청 우후(원유남) 및 본영 우후(이몽구)와 박윤, 신경징 등을 불러와서 술 마시며 이야기했다. 윤연(尹連)이 자기 포구로 간다고 하기에 도양장道陽場의 종자콩이 부족하면 김덕록(金德祿)에게서 가져가도록 체자(帖子, 증명서)를 써 주었다. 남해 현령(박대남)이 도임장(到任狀, 임명서)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
♥ 1596년 윤8월 19일(계미) 맑음.
녹도(鹿島)로 가는 길에 도양道陽의 둔전(屯田)을 살펴보았다. 체찰사(이원익)는 얼굴에 희색이 만연했다. 녹도에 도착하여 잤다.
♥ 1597년 5월 12일(임인) 맑음.
새벽에 이원룡을 보내서 부찰사(한효순)에게 문안했더니, 부찰사도 김덕린을 보내서 문안했다. 늦게 이기남과 기윤이 와서 도양장道陽場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아침에 아들 열을 부찰사에게 보냈다. 신홍수가 보러 와서 원공(균)의 점을 쳤는데, 첫 괘가 수뢰 둔인데, 천풍 구로 변했으니, 본체를 이기는 것이라 크게 흉한다고 했다. 남해현령(박대남)이 조문 편지를 보내고 또 여러 가지 물품을 보냈다. 쌀 2섬, 참기름 2되, 꿀 5되, 조 1섬, 미역 2동. 저녁에 향사당에 가서 부찰사와 함께 깊도록 이야기하고 삼경(23시-1시)에야 숙소로 돌아왔다. 정사립과 양정언이 와서 닭이 운 뒤에 돌아갔다.
♥ 1597년 10월 30일(정해) 맑으나 동풍이 불고 비올 징조가 많았다.
아침에 집 지을 곳에 내려가 앉았으니, 여러 장수들이 와서 알현했다. 해남 현감(유형)도 와서 적에게 붙었던 자들이 한 행위를 전했다. 일찍 황득중을 시켜 목수를 데리고 섬 북쪽 산봉우리 밑으로 가서 집 지을 재목을 벌목해 오게 했다. 늦게 적에게 붙었던 해남의 정은부(鄭銀夫)와 김신웅(金信雄)의 부인과 왜놈에게 지시하여 우리나라 사람을 죽인 자 2명과 사족(士族)의 처녀를 강간한 김애남(金愛南)을 모두 목베어 효시(효시)하였다. 저녁에 양밀(梁謐)은 도양장道陽場의 둔전(屯田) 곡식을 멋대로 나누어 준 일로 곤장 60대를 쳤다.
참고
둔전(屯田): 고려와 조선시대, 군졸이나 서리, 평민 등에게 아직 개간하지 않은 땅을 개척하여 경작하게 하고 여기에서 나오는 수확물의 일부를 지방 관청의 경비나 군대의 양식으로 쓰도록 한 밭.
참고문헌
1.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 이순신 저, 노승석 역주
2. 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 1권, 2권 이민웅, 정진술, 양진석, 김경숙, 노영구, 이현진, 김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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