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한산도•안골포 해전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연합 함대는 제2차 출전에서 72척의 적선을 분멸시키고 진을 파한 채 각자 주둔지로 복귀하였다. 1592년 7월 초 일본 수군은 가덕과 거제 등지에서 떼를 지어 출몰하였고, 일본 육군은 금산지역에까지 적세가 크게 뻗치고 있었다. 이에 대비하고자 전라좌도와 전라우도 수군은 7월 4일 저녁 때 모여 7월 5일까지 방책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7월 6일 함대를 거느리고 일제히 발선하였다. 노량에서 경상우도의 전선 7척도 합류한 후 진주 땅 창신도에 이르러 밤을 보냈다.
1) 한산도 해전의 승리
7월 7일 동풍이 크게 불어서 배를 운행하기 어려웠다. 고성땅 당포에 이르니, 피란하여 산에 올랐던 미륵도의 목자(牧子) 김천손이 조선 수군 함대를 바라보고 급히 달려와 보고하기를, ‘적의 대•중•소선을 합하여 70여 척이 오후 2시경 견내량에 이르러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과 회의를 통해 작전 계획을 수립하고, 7월 8일 이른 아침에 적선이 머무르고 있는 곳으로 행선하였다. 바다 복판에 이르렀을 때 마침 일본수군의 대선 1척과 중선 1척이 선봉으로 나와서 조선 수군 함대를 탐지하고는 결진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조선 수군이 뒤따라 들어가 확인하니 적선 73척의 대열이 늘어서 있었다.
이 일본함대는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거느린 일본의 정예 수군으로 토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지시에 따라 조선 수군과 일전을 펼치기 위해 온 것이다.
당시 조선 수군의 전선 수는 58척으로 이중 3척은 거북선이었다. 일본의 전선 중 전투 능력을 갖춘 대•중선이 모두 60척임을 감안할 때 양국의 전선수는 대등한 수준이었다.
이순신은 견내량의 지형이 매우 좁고 또한 암초가 많아 판옥선끼리 부딪힐 수 있음을 염려하였다. 또 만약 적의 형세가 급하게 되면 기슭을 타고 육지로 상륙할 것이므로,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모조리 잡아버릴 계획을 세웠다. 이때 유인 함대를 지휘한 장수는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이다.
이러한 작전 계획에 따라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이 이끄는 판옥선 5-6척으로 하여금 선봉으로 나온 적선을 뒤쫓아서 습격할 기세를 보였다. 그러자 일본군선이 일시에 돛을 달고 쫓아오므로 유인함대가 거짓으로 물러나 돌아 나오자, 적들도 줄곧 쫓아왔다. 유인함대가 넓은 바다에 이르러 본대와 합류했을 때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학익진’을 벌여서 일시에 진격하였다. 각각 지자•현자•승자 등의 각종 총통을 쏘아서 먼저 2-3척을 쳐부수자 일본군선은 도망하였다. 이에 여러 장수와 군사들이 이 기세를 틈타 앞 다투어 돌진하면서 화살과 화전을 번갈아 쏘아 적선을 불태우고 적군을 사살하여 일시에 없애버렸다.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일본수군의 선봉선을 깨트린 것은 거북선이었다.
위와 같이 한산도 해전은 단 시간에 승부가 결정되었는데, 그것은 조선 수군의 전력이 가장 잘 응집되어 효율적인 전술이 유감없이 발휘되었기 때문이다. 한산도해전에서 조선의 전선은 1척의 손실도 없이 일본 전선 73척 중 47척을 분멸시켰고, 12척을 온전하게 나포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일본수군의 대장 와키자카는 겨우 목숨을 건져 패잔전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전투 중 일본군 장졸 400여 명은 배를 버리고 한산도에 상륙한 후 섬 안으로 들어갔다. 이에 조선 수군은 적선을 추격하려고 했지만 날이 어두워 끝까지 추격할 수 없어서 견내량 앞바다에 결진하고 밤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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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해전 상황도 | 학익진도(鶴翼陣圖) |
2) 안골포해전의 승리
조선 수군 함대는 한산도해전 때와 마찬가지로 7월 9일 저녁에 제장들과 함께 작전회의를 가진 후 7월 10일 새벽에 발선하였다. 전라우수사는 안골포 바깥 바다의 가덕 변두리에 결진해 있다가, 전라좌수군과 경상우수군이 접전을 시작하게 되면 복병을 남겨두고 급히 달려오도록 사전 약속하였다. 그리고 이순신은 함대를 거느리고 학익진을 벌여 먼저 전진하고 경상우수사는 이순신의 뒤를 따르게 하였다.
조선 수군 함대가 안골포에 이르렀을 때 선창에는 42척이 머물고 있었다. 그중에 3층으로 뚜껑있는 대선 1척과 2층으로 된 대선 2척이 포구에서 밖을 향하여 부박하고 있었으며, 그 나머지 배들은 고기비늘처럼 잇대어 있었다.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수군 장수는 쿠키 요시타카(구귀가륭 九鬼嘉隆)와 가토 요시아키(가등가명 加藤嘉明)이었고, 이들 또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직속 정예수군이었다. 이들은 단독으로 출전을 감행한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뒤쫒아 7월 7일 김해로 이동하였고, 다음날 이곳 안골포로 옮겨 와서 정박 중이었다. 이들은 히데요시의 공격 명령을 수행하고, 앞서 출전한 와키자카 야스하루 함대를 돕기 위해 서둘러 출발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안골포의 전투 환경은 조선 수군의 학익진 형성에 적합하지 않았다. 여러 번 유인작전을 펼쳤지만 한산도 해상에서 선운선 59척이 참패를 당한 사실을 전해들은 일본수군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순신은 다음의 기록에서와 같은 새로운 전술을 구사하였다.
‘할 수 없어서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서로 교대로 출입하면서 천자•지자•현자 총통과 여러 가지 총통뿐 아니라 장편전 등을 빗발같이 쏘아 맞히고 있을 무렵에 본도 우수사가 장수를 정하여 복병시켜 둔 뒤 급히 달려와서 협공하였습니다. 그래서 군세가 더욱 강해져 방이 있는 대선과 2층 대선을 타고 있던 왜적들은 거의 다 사상하였습니다.’
즉 위의 기록 중 ‘서로 교대로 출입하면서’라는 표현과 같이 포구가 좁은 점을 고려하여 일종의 ‘장사진’을 구성하여 공격하였다. 그리고 약속대로 전라우수군까지 합세하여 병력 집중의 원칙을 견지함으로써 전투의 효율성을 배가시켰다. 또한 대장선인 대선을 위주로 선제공격하는 전술을 구사하여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효과를 기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때도 거북선에 의한 공격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다음의 일본 측의 기록들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요시타카•요시아키의 배가 7일 가덕에 닿고, 8일 당도에 정박했다. 9일 적함 대소 백여 척이 공격해 왔는데, 화포•화시가 비와 같았다. 아군 또한 대포를 발사하여 서로 살상자가 있었다. 싸움은 진시에서 유시까지 계속되었다. 적선 중에는 전부 철창으로 하고 있는 것이 있어 우리 포가 능히 손상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적군의 화전은 지름과 길이가 크고 길었으며, 철전은 단지 발사하면 우리 장수가 있는 루노가 위급하였다.’
위의 기록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철장을 하고 있는 배 또는 맹선으로 언급된 배는 거북선으로 추정되며 3척이 참전한 것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조선의 화포공격은 석화시(대장군전으로 추정), 봉화시(장군전으로 추정) 등의 피사체를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안골포해전 조선 수군의 작전 상황도를 보면 [그림4-9]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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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골포해전 상황도 1 | 안골포해전 상황도 2 |
조선 수군의 집중공격에 당하지 못한 일본군 다수가 육지로 도주하였다. 당시 안골포 산 속에는 많은 백성들이 잠복해 있었다. 이순신은 일본의 전선들을 모조리 없앨 경우 궁지에 빠진 일본군들에 의해 백성들이 비참한 살육을 면치 못할 것을 염려하였다. 이순신의 애민사상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남은 전선을 둔 채 1리쯤 물러 나와 밤을 지냈다.
다음 날인 11일 새벽에 다시 돌아와 포위해 보았으나 일본군들이 당황하여 닻줄을 끊고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였다. 전투 현장에서는 일본군이 전사한 동료들을 열두 곳에 모아 쌓고 불태운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일본함대는 그 나머지 항해가 가능한 군선으로 야간을 이용해 안골포를 탈출, 부산쪽으로 도주하였다. 이순신은 가덕 바깥으로부터 동래•몰운대에 이르기까지 배를 늘어세워 진을 치게 하고 조선 수군의 위세를 과시한 후 밤을 틈타 철군하여 12일 오전에 한산도에 도착함으로써 작전을 종료하였다.
이날의 전투 결과는 이순신의 기록에 의하면 정확한 척 수가 나오지 않고 적선들을 거의 다 쳐부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일본 측의 기록에 의하면 이날 일본군은 20척의 군선을 잃었다고 한다. 어쨌든 안골포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적어도 20척 이상을 분멸시켰다.
한산도해전과 안골포해전의 경과를 다음 [그림4-11]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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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안골포해전 상황도 |
3) 흥양 수군의 전과 및 피해
조선 수군은 한산도해전과 안골포해전을 합하여 약 80척의 적선을 분멸시켰다. 이 해전들에서 흥양 수군이 거둔 전과는 얼마나 될까? <표4-6>에서 보면 한산도해전의 경우 소속 수군별 전과가 비교적 드러나고 있지만, 안골포해전의 경우에는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고 있다 어쨌든 제2차 출전과 마찬가지로 한산도해전에서도 흥양 수군은 발군의 활약을 보이고 있다.
<표4-6> 제3차 출전 흥양 수군의 전과
해전지 | 전투편제/소속 직책(급) 성명 | 전과(전선) |
한산도 (1592.7.8.) |
우부장/ 사도첨사 김 완 | 대선 1척 |
후부장/ 흥양현감 배흥립 | 대선 1척 | |
좌척후장/ 녹도만호 정 운 | 층각대선 2척 | |
우척후장/ 여도권관 김인영 | 대선 1척 | |
유군장/ 발포만호 황정록 | 층각선 1척 | |
좌도의 여러 장수들 | 대선 20척, 중선 17척 소선 5척 | |
소 계 | 59척 | |
안골포 (1592.7.10.) |
각도 전선(전라좌수군, 전라우수군, 경상우수군) | 대선 21척 |
소 계 | 21척 | |
총 계 | 80척 |
이를테면 녹도만호 정운은 적의 층각대선(지휘선)을 무려 2척이나 분멸시켰으며, 발포만호 황정록 역시 층각선 1척을 분멸시켰다. 아울러 사도첨사 김완, 흥양현감 배흥립, 여도권관 김인영 등은 적의 대선 1척씩을 각각 분멸시켰다. 이들 외에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흥양 수군은 ‘전라좌도의 여러 장수들’이 거둔 전과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였을 것임은 물론이다. 동시에 안골포해전에서도 흥양 수군은 적선 21척을 분멸시키고 승리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면 이 해전들에서 일본군의 인명 손실은 당시 일본군에 포로로 붙잡혀갔다 돌아온 제만춘이 언급하기를 9천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이분의 「행록」에도 나온다.
그러면 조선 수군의 피해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 우선 조선 수군의 전선은 1척도 분멸되지 않았다. 그러나 인명 피해는 다소 발생하였다. 이순신의 장계에 의하면 한산도해전과 안골포해전에서 입은 조선 수군의 피해는 전라좌수군의 경우에만 언급하고 있다. 즉 전라좌수군의 경우 전사 19명, 부상 115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흥양 수군의 피해는 어느 정도일까? 다음의 각 진별 사상자 현황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표4-7>은 제3차 출전 흥양 수군의 전사상자 명단(98~100쪽 부록 8 참조)을 정리한 것이다.
참고문헌
1.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 이순신 저, 노승석 역주
2. 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 1권, 2권 이민웅, 정진술, 양진석, 김경숙, 노영구, 이현진, 김남기
3. 임진왜란 흥양해전사 2016 연구 제장명, 고용규, 송은일, 김병륜, 송호철, 윤여석
4. 임진왜란과 흥양수군 2015 연구 제장명, 송은일, 정진술, 신윤호, 한성일, 송철환, 송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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