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녹도진과 쌍충사

4.손죽도 해전의 경과와 교훈

녹도진 2025. 1. 12. 14:16

4. 손죽도 해전의 경과와 교훈

손죽도 해전이 일어났던 흥양을 비롯한 서남해안 지역은 주기적으로 왜구들이 침입하는 사건이 많았다. 특히, 1497(연산군 3) 녹도왜변, 1544(중종 39) 사량왜변, 1555(명종 10) 을묘왜변과 같은 사건은 왜구가 대규모로 침입하여 이 지역에 많은 피해를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특별한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 1587(선조 20) 1월 말경에 왜구들이 녹도진 앞바다에 침입하였다. 일반적으로 동남풍이 불어오는 4월 이후에 침입하는데 그 예상을 뒤집고 이른 시기에 침입하자 녹도진 만호 이대원은 상관이었던 전라좌수사 심암에게 보고도 못한 채 수군들을 이끌고 출전하여 왜구들을 쳐서 궤멸시켰다. 이대원과 녹도진 군사들은 전사하거나 실종된 군사가 하나도 없이 대승을 거두게 되는데, 뒤늦게 이대원이 돌아와 전라좌수사 심암에게 보고하자. 자신에게 보고도 없이 출정한 것은 전공을 혼자 독차지하기 위한 것으로 오해하여 이대원을 미워하게 된다. 또 다시 21일에 왜선 18척이 전라좌수영 관할 지역인 흥양 손죽도(현재 여수시 삼산면)를 침범하여 점령한다. 이 사건은 ‘1587(선조 20) 정해년에 일어났다.’하여 정해왜변 또는 손죽도해전이라고 부른다.


 
흥양 14포와 손죽도의 위치   손죽도

 

왜구들에 의하여 손죽도가 점령당하자, 전라좌수사 심암은 이대원에게 먼저 출전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번에 침범한 왜구들의 함대 수준은 이전과는 달리 여러 가지 무기를 장착하고 나타났다. 이 점을 파악한 이대원은 전라좌수사 심암에게 군사를 더 많이 모아 함대를 크게 만들어 출전하자고 진언하지만, 심암은 도리어 협박까지 하면서 즉각 출전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때 심암은 후방을 맡고 이대원은 전방을 맡아 손죽도 해상에서 왜구와 전면전을 펼쳤다. 그러나 대형 함대와 조총으로 무장한 왜구의 전력은 막강했다. 녹도만호 이대원은 심암의 지원을 기다렸지만, 후방을 맡고 있던 심암은 관망만 한 채 지원 공격을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이대원과 녹도진 군사들은 고립되어 패하게 되었고 이대원은 자기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절명시를 써서 집안 하인에게 주며 자신의 장례를 부탁했다고 한다.

이대원은 본관이 함평이고 1553(명종 8) 양성(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고 1583(선조 16) 무과에 합격했으며, 1587(선조 20) 35세로 손죽도 해전에서 전사했다. 이대원과 휘하 군사들을 전사시키고 전라좌수군을 물리친 왜구들은 손죽도에 이어 인근의 섬들을 약탈한 후 완도의 가리포진까지 함락하였다.

이에 조정은 한성 우윤 신립, 우참찬 김명원 등을 왜구들이 침입해 온 전라좌수영 관할 지역으로 보내어 지원할 것을 명령하였고 변협을 좌방어사로 삼아 남쪽 지방으로 출정하게 하고 우참찬 김명원을 전라도 순찰사로 삼아 손죽도를 침범한 왜구를 치게 하였다. 전라 감사였던 한준은 도내의 고을에 명령하여 군사를 일으켜 적을 막게 하였으나, 이미 왜구들이 물러난 상태였다.

   
[그림1-20] 손죽도 이대원 사당의 위치도   [그림1-21] 손죽도 이대원 사당

 

손죽도 사건으로 전라좌수영 관할 지역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주민들을 닥치는대로 살해하고 수백명을 납치하여 외국으로 팔아넘기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피해가 심했던 것은 전라좌수사 심암이 이대원과 녹도진 군사들은 최전선에서 싸우게 하고 자신은 관망만 하였고 조정에 정확한 보고도 누락함으로써 대응 전략에 차질을 빚게 하였다.

손죽도 사건이 끝난 후 선조는 심암을 참수하여 여러 군사들에게 본보기로 삼으라고 지시했고 전라우수사 원호는 국문을 받았으며 전라감사 한준은 파직을 당하였다.

 

손죽도 사건 이후 조정에서는 왜구가 언제 다시 나타나 전면전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판단하여 병조에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병조에서는 왜구의 침략이 예상되는 전라도 해안 지역의 방비를 강화하고 무신과 양민, 노비 등을 가리지 않고 활쏘기를 잘하는 사람을 선발하여 여러 가지 무기 등을 갖추어 놓겠다고 보고하였으며, 손죽도 사건으로 인해 전국이 준전시 상황에 접어들 정도로 긴박하게 움직였다.

순국한 이대원에게는 정려와 함께 병조참판으로 추증하고 그 외 희생자들에게는 이대원과 함께 제사를 지내고 포상도 하였다. 손죽도 사건의 전공자들에게 포상한 조정은 녹도사(鹿島祠)라는 사당을 건립하여 이대원의 공적을 기렸다. 녹도사는 후에 쌍충사가 되었다.

 

이대원의 절명시

日暮轅門渡海來  兵孤勢乏此生哀

君親恩意俱無報  恨入愁雲結不開

해 저문 진중에 바다 건너와  슬프다, 외로운 군사 끝나는 인생

임금과 부모님 은혜 갚을 길 없어   원한이 구름 속에 얽혀 풀리지 않네

 

 

 

참고문헌

1. 임진왜란 흥양해전사 2016 연구 제장명, 고용규, 송은일, 김병륜, 송호철, 윤여석

2. 임진왜란과 흥양수군 2015 연구 제장명, 송은일, 정진술, 신윤호, 한성일, 송철환, 송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