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노량해전과 흥양 수군
8. 노량해전과 흥양 수군
1)순천 예교성 수륙합공전의 수행
1598년(무술년) 9월 하순부터 동로군, 중로군, 서로군과 수로군의 공격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중 수로군의 활동인 순천 예교성(曳橋城) 수륙합공전을 중심으로 당시의 전황을 살펴보면, 예교성(曳橋城)은 왜교성(倭橋城)이라고도 하며 순천 동남쪽 25리 되는 곳에 있다. 이 성은 여수 반도의 목을 차지하여 서쪽은 산에 의지하고 북•동•남의 삼연은 광양만에 면하였으며, 북쪽에 하나의 채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1597년(정유년) 겨울 중에 일본군의 우키다(宇喜多秀家)•토도(藤堂高虎) 등이 신축한 것이다.
당시 예교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수는 1만 5천 명이고, 예교성의 형세는 3면이 바다로 둘러 있어 1면만 공격이 가능한 데, 땅이 질어서 공격하기가 쉽지 않았다.
서로군과 수로군의 예교성 수륙합공은 9월 20일에 시작되었다. 서로군의 제독 유정(劉綎)은 9월 11일에 출전식을 거행하고 전주에서 출발, 곡성현을 경유하여 9월 19일 부유(富有, 주암)에 진출하였다.
당시 조•명 연합수군은 고금도를 출발하여 9월 15일에 나로도(조•명 연합수군이 유진했던 곳은 현재 고흥군 봉래면 진기마을)에 도착하여 3일간 머물고, 18일에 방답진을 거쳐 19일에 전라좌수영 앞에 정박하였다가 20일 오전 8시 경에 묘도(猫島)에 도착하였다. 조선 수군은 장도에 주둔하고 명 수군은 묘도에 주둔하여 일본군의 도주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예교성 수륙 합공전은 9월 20일부터 6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첫 번째 전투에서는 서로군이 먼저 육지에서 공격하였는데, 유정이 이끄는 서로군은 예교에 진격해 들어가서 성 밖 7-8리 지점에서 맞서 교전한 결과 일본군이 퇴각하였다. 고니시를 사로잡는 데 실패한 서로군은 일본군을 쫓아 예교성 앞까지 공격하였다.
조•명연합수군도 해상에서 포를 쏘며 공격을 가하였는데, 이때 수군의 전과는 괄목할만하였다. 일본군의 해상 기지로 되어 있던 성 동쪽의 장도를 공격하여 적의 군량 300여 석과 우마 등을 탈취하고 조선인 포로 300여 명을 쇄환하였을 뿐만아니라 가까운 삼일포의 적 소굴을 습격하였다.
9월 21일에도 조•명연합수군은 예교성을 공격했는데, 물이 얕아 더 가까이 다가가 싸울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남해의 일본군 중 정탐선이 나타나자 이를 추격하여 빈 배를 노획하였다. 다음 날인 22일에도 조•명연합수군은 예교성을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명의 유격 계금(季金)이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는 부상을 당했고, 명군 11명이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조선 수군도 지세포만호와 옥포만호가 총상을 입었다. 9월 30일에는 명 수군의 참장 왕원주(王元周)와 유격장 복일승(福日昇), 그리고 파총 이천상(李天常) 등이 함선 100여 척을 거느리고 와 합세하였다.
제독 마귀(麻貴)가 이끈 동로군은 성 밖 30리 지점에 쌓아놓은 적군의 양식을 모두 불태웠지만 9월 22일 일본군의 야간 습격으로 패전하였고, 제독 동일원(董一元)이 이끄는 중로군은 9월 18일에 진주를 공격하고 여세를 몰아 사천을 공격하였지만 시마즈 요시히로의 복병으로 완전히 패전하였다.
한편 수로군의 경우 제독 유정 서로군과 함께 10월 2일을 기하여 수륙협동으로 총공격을 감행하기로 약속하였지만 육상에서 서로군은 제대로 공격하지 않고 머뭇거리면서 오히려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서로군 20여 명이 전사하였다.
그런 반면 10월 2일 수군은 혈전을 벌였다. 조•명연합수군은 혈전을 거듭한 결과 일본군 다수를 사살하였다. 이 전투에서 많은 적을 살상하였지만 조선 수군의 전사자도 29명이었고, 명군의 사망자도 5명이나 발생하였다.
다음날 10월 3일에는 수군이 조수를 타고 혈전하여 대총(大銃)으로 고니시의 막사를 맞추자, 일본군이 당황하여 모두 동쪽으로 물러갔다. 만약 서로군이 공격하여 들어갔다면 성을 함락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김수가 문을 열어젓히고 싸우자고 청하였지만 유정은 노기를 띠고 끝내 군대를 출전시키지 않았다. 유정은 마침 사천의 중로군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후퇴를 결정하였다.
한편 조•명연합수군은 10월 3일에 조수를 타고 진격하여 많은 일본군을 격퇴시켰다. 그러나 명 수군이 치열하게 싸우느라 조수가 빠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명 군선 23척이 얕은 항만에 걸리자, 일본군들이 공격하여 명 수군이 다수 전사하였다. 조선 수군의 전선 7척도 얕은 곳에 걸렸지만, 다음 날 수군이 일찍 조수를 타고 와 구원하였기에 무사할 수 있었다.
다음 날 10월 4일에도 조•명연합수군은 종일 역전하여 적에게 피해를 입혔다. 서로군과 함께 예교성에 수륙합공작전을 수행했던 조•명연합수군은 유정의 육군이 퇴군함으로써 정세를 관망하다가, 10월 7일에 나로도에 도착하여 진을 치고 사변에 대비하였다.
이렇듯 6차례에 걸친 예교성 수륙합공전의 상황도를 도시하면 [그림4-22]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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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교성 수륙합공도 |
여기서 조•명연합수군이 머무른 나로도에 대하여 살펴보자. 나로도는 외•내도로 이루어진 섬으로 사양도, 애도, 수락도 등 유인도와 형제도, 동백도 등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나로도의 역사는 조선시대 흥양현의 부속 도서였다가, 1896년 돌산군이 신설되면서 돌산군 봉래면이 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4년 부•군폐합 시 다시 고흥군 봉래면이 되었다.
나로도는 동쪽 바다와 서쪽 바다를 이어주는 교량의 역할을 하였고, 거문도를 이어주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이런 이유로 왜구를 비롯한 해구의 침입이 잦았는데, 자료를 살펴보면 1442년(세종 24) 8월 15일 고도, 초도, 나로도에 왜인이 병기를 가지고 침입하여 발포천호 김정부에 위해 체포되었고, 1526년(중종 21)에는 왜적들이 삼도에서 옷과 양식을 약탈한 후 나로도로 건너와서 약탈하다가 전라좌수영 수군에게 진압되었다. 1555년(명종 10)에는 왜선 2척이 침입하여 전라좌수사 최종호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듬해 3월에는 평산포에서 10척의 왜선이 나로도에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렇듯 나로도는 조선 초기에 나로도보(羅老島堡)가 설치되어 만호가 지휘한 바 있었고, 통신시설이었던 봉수대는 총 4개가 있었는데, 봉래면 외초리의 봉래산봉수, 봉래면 신금리의 진터산봉수, 사양도봉수, 동일면 덕흥리 소포봉수가 있었다. 조•명연합수군의 선단은 외나로도 진기마을과 사양도, 내나로도 사이 바다에 주둔하였다. 그리고 방답진으로 출항하기 전 이곳에 진지를 구축할 것을 명령하고 진지를 비롯해 봉수대, 망루 등을 축조하였다.
[그림4-23]에서 보는 바와 같이 9월 15일 나로도에 도착하여 진을 친 곳은 바로 사양도와 애도, 외나로도, 내나로도의 중간이었다. 현재도 나로도항 북쪽 해안을 “진터”라고 부르며 이순신이 진을 쳤던 곳으로 구전되고 있다.
조•명연합수군이 나로도에 머문 시기는 두 차례인데, 첫 번째는 고금도에서 예교성을 공격하기 위해 출발한 후인 1598년 9월 15일부터 18일까지였고, 두 번째는 예교성 수륙합공전이 종료된 후 철수하여 10월 12일에 나로도에 도착한 후부터 11월 8일까지이다.
그럼 조•명연합수군이 나로도에 유진하고 있을 때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첫째, 군량의 확보에 힘쓴 것으로 보인다. 『선조실록』에 등장하는 수로의 진 도독이 군량이 떨어졌다는 보고에서 볼 수 있듯이 조•명연합수군에게 절실한 것은 군량이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군량을 바치는 인물, 군량 종류, 수량의 기록 중에서 10월 7일 송한련과 김태정의 기록이 나와 있다.
통제사 이순신은 이러한 군량문제를 해결할 방법으로 개전 초기부터 흥양의 도양장(道陽場), 순천의 돌산돌, 강진의 화이도, 해남의 황원곳에 둔전을 설치하여 해결하였다. 나로도는 외나로도와 내나로도, 성두관 등에 목장이 설치되어 초지가 발달하였는데, 이곳에 둔전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순천 예교성에 있는 왜적의 섬멸을 위해 전투 작전을 구상하고 탐망으로 적정을 살폈다. 『난중일기』 11월 8일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적들이 10일 사이에 도망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하고 작전회의를 진행하기도 하였고, 통제사 이순신이 해구(海口)를 막아 순천 예교성으로부터 일본군의 출입을 원천봉쇄하고 있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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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합수군 예교성 출전도 |
셋째 수군에 있어 전선은 매우 중요했고, 전투 중 많이 망실되어 새로 건조하거나 수리가 필요했다. 흥양현은 1448년(세종 30)에 23곳에서 송전으로 관리되고 있었는데 나로도에도 송전이 설치되어 관리되고 있었다. 나로도에 설치된 송전을 사도진에 환속시키라는 기사에서 송전의 설치가 확인된다. 이렇게 흥양에 산재한 송전의 존재는 조•명연합수군의 전선 건조와 수리에 큰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나로도 조•명연합수군 임시주둔지는 정유재란의 막바지에 순천 예교성을 도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명연합수군의 기지이며, 고금도에서 이진한 임시통제영이었다. 이곳에서 식량과 무기 등 후방지원과 조•명연합수군(수로군)의 작전수립, 전선의 건조와 수리가 이루어졌다.
사로병진작전은 수로군만이 제몫을 했을 뿐 육로의 삼로 모두가 실패한 가운데 전황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서로군 역시 동로 및 중로와 마찬가지로 남원의 부유까지 물러나면서 일본군과의 전투는 당분간 소강상태가 되었다.
2) 노량해전과 흥양수군
(1) 해전의 배경
소강상태에 빠진 전황이 다시 활성화 된 것은 일본의 관백 토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사망한 사실이 전해지면서, 일본군이 철수할 것이라는 정보가 입수되고부터였다. 이러한 정보는 1598년(무술년) 전반기부터 소문으로 전해져 왔지만 실제 토요토미가 사망한 날짜는 1598년 8월 18일이었다. 이로써 히데요시의 유훈을 받은 오대로(五大老)는 조선에서의 철군을 결정하고 이 방침을 조선에 출병해 있던 제장에게 ‘화의(和議)를 성립시키고 11월 중순까지 귀국하라.’는 명령으로 전달하였다.
이러한 정보가 입수되자 수로군과 서로군의 수뇌부는 다시금 예교성 공격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1월 8일에 이순신은 나로도 진중에서 도독부를 방문하여 위로연을 베풀고 그날 밤 도독 진린과 밀담하여 예교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다음 날인 10월 9일부터 연합함대는 다시 출동하게 되어 백서량(여수시 남면)에 결진하였고, 10일에는 좌수영 전양에 이르렀고, 11일에는 다시 묘도에 도착하여 결진하였다.
한편 순천 예교성 공격에서 부유로 물러났던 유정은 다시 예교성 공격을 위해 11월 1일 출발하였다. 유정은 부유에 군사를 집결시키고 고니시와 화의를 의논한 끝에 고니시가 총검류와 인질을 보내고, 유정은 질관으로 기수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가정 30명을 이끌고 같이 가게 하였다.
고니시는 진 도독에게 날마다 선물을 보내면서 말하기를 “남해에 사위가 있는 데 사람을 보내 불러오려고 하니 이곳의 배를 내보내주기 바란다.”하자, 이순신이 말하기를, “속임수의 말을 믿어서는 안된다. 사위를 불러온다는 것은 구원병을 청하려는 것이니 결코 허락할 수 없는 일이다.” 하였으나, 진린은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1598년 11월 14일 1척의 작은 배를 보냈는데 왜인 8명이 타고 있었다. 그 뒤에 이순신이 말하기를, “왜선이 나간 지 이미 4일이 되었으니 구원병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러니 우리들도 묘도 등지로 가서 차단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이순신은 휘하 장령들과 회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이순신 휘하 군관 송희립과 해남현감 류형은 이순신의 의견에 찬동하면서 일본군에 대한 각개격파의 작전을 세웠다. 그리고 이 뜻을 진린에게 알렸는데 깜짝 놀란 진린이 그제야 작은 배로 연락하는 것을 허락하였던 자기의 무지를 자책하는 눈치였다.
한편 일본군의 여러 부대는 11월 11일에 철수를 시작키로 하고 요시히로와 요시토시는 창선도에 집결하였고, 무네시게 등은 거제도로 옮겨 대기하였다. 이들은 고니시가 철수하여 오는 것을 기다렸으나 그들이 순천 예교에서 조•명연합수군에 의하여 귀로를 차단당해 늦어지게 된 것을 알자 18일에 시마즈 요시히로, 소 요시토시, 다치바나 무네시게와 부산에서 온 데라자와 마사노리(寺澤正成), 다카하시 오사나가(高橋統增) 등이 함선 약 5백척을 이끌고 남해도에서 밤 이용하여 노량해협을 지나 고니시 유키나가군을 구원하기로 하였다.
(2) 해전의 경과
이날 조•명연합수군은 적을 노량 부근에서 맞아 싸우기로 하고 장도를 떠나 묘도로 옮아간 뒤, 밤 10시 경에 부장인 등자룡(鄧子龍)과 통제사 이순신을 선봉으로 삼고, 진린 자신은 부장인 진잠(陳蠶), 유격장 계금(季金), 복일승(福日昇), 왕원주(王元周), 심무(沈懋), 파총 이천상(李天常) 등을 거느리고 그 뒤를 따라 나갔다. 당시 조선 수군의 세력은 판옥선이 60여 척이었고, 명 수군의 전선은 4백여 척이었다. 한편 노량해전에 참전한 조선 수군의 주요 장령과 명 수군의 장령 현황은 다음의 <표4-14>과 <표4-15>와 같다.
<표-14> 노량해전 참전 조선 수군의 주요 장령
소속 | 직책/성명 | 소속 | 직책/성명 |
전라좌수군(8) | 전라좌수사 겸 통제사 이순신(李舜臣) |
경상우수군(10) | 경상우수사 이순신(李純信) |
경상우조방장 배흥립(裴興立) | |||
순천부사 우치적(禹致績) | 미조항첨사 김응함(金應諴) | ||
낙안군수 방덕룡(方德龍) | 당포만호 안이명(安以命) | ||
흥양현감 고득장(高得蔣) | 사량만호 김성옥(金聲玉) | ||
사도첨사 이섬(李暹) | 안골포만호 우수(禹壽) | ||
발포만호 소계남(蘇季男) | 제포만호 주의수(朱義壽) | ||
군관 송희립(宋希立) 이언량(李彦良) |
조라포만호 정공청(鄭公淸) | ||
옥포만호(불명, 난중일기) | |||
전라우수군(8) | 전라우수사 안위(安衛) | 지세포만호(불명, 난중일기) | |
장흥부사 전봉(田鳳) | |||
진도군수 선의문(宣義問) | |||
강진현감 송상보(宋尙甫) | 충청수사 오응태(吳應台) | ||
해남현감 류형(柳珩) | 당진포만호 조효열(趙孝悅) | ||
가리포첨사 이영남(李英男) | 서천만호(불명, 난중일기) | ||
금갑도만호 이정표(李廷彪) | 홍주대장(불명, 난중일기) | ||
회령포만호 (불명, 난중일기) | 한산대장(불명, 난중일기) |
※ 출처: 이형석, 『壬辰戰亂史』(下) 117쪽; 『선조실록』 권101, 31년 6월 17일(庚辰); 『난중일기』
<표4-15> 노량해전 참전 명 수군의 주요 장령
직책 | 성명 | 직책 | 성명 | 직책 | 성명 |
도독 | 진린(陳璘) | 부총병 | 등자룡(鄧子龍) | 참 장 | 왕원주(王元周) |
부총병 | 진잠(陳蠶) | 유격장 | 허국위(許國威) | 유격장 | 계금(季金) |
유격장 | 심무(沈懋) | 유격장 | 복일승(福日昇) | 유격장 | 양천윤(梁天胤) |
유격장 | 마문환(馬文煥) | 유격장 | 장량상(張良相) | 파 총 | 이천상(李天常) |
파 총 | 심리(沈理) | 중 군 | 도명재(陶明宰) |
※ 출처: 이형석, 『壬辰戰亂史』(下) 1117~1118쪽
한편 사천성에서 동일원을 물리치고 창선도로 군사를 철수한 시마즈는 정병만을 무장케 한 후 노량해협을 향하여 항진하였다. 총 500여 척 중 시마즈가 거느린 선발대 300여 척이 먼저 노량수로를 진입해 온 것이었다.
조•명연합수군은 11월 18일 밤 예교성의 고니시 군에 대한 퇴로 차단작전을 변경하여, 이날 밤 10시경 노량수로 좌단 쪽으로 이동하였다. 약 2시간에 걸친 이동 끝에 조•명연합수군은 이날 밤 자정 무렵 노량수로 좌단쪽에 도착하였다. 이때 진린이 이끈 명 수군은 좌협이 되어, 대도 북방의 죽도 부근에 포진하고,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은 우협이 되어 노량수로 좌단부터 관음포 입구에 이르기까지 횡렬로 포진하였는데, 닻을 내리지 않고 응전태세로 대기하였다.
이윽고 한밤중이 지나서 척후선으로부터 경보를 받게 되는데, 적의 대함대가 사천 남쪽에 있는 광주양(光洲洋, 노량수로 동단의 외양)을 통과하여 서쪽 노량방면을 향한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복병장으로 나가있던 경상우수사 이순신(李純信)도 일본군의 서항(西航)을 확인하여 급보하였으므로 좌우 양협은 일제히 노량수로를 목표로 항진하였다.
19일 새벽 2시경에 일본의 구원군이 노량수로 좌단에 도착하였다. 적 함대가 근접하여 오자 진린은 진격의 영을 내렸고, 이순신도 먼저 적선열 중간을 돌파하여 들어갔다. 이때 명 수군은 호준포•위원포•벽력포를 일시에 쏘았고, 조선 수군도 각양 총통을 쏘면서 신화(薪火)를 던지고 화전(火箭)을 발사했다. 이에 일본군선은 선수를 돌릴 새도 없이 부서지고 불이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좌우에서 화살을 빗발같이 쏘았다. 그러자 일본군은 당황하여 동요의 빛이 짙었고, 일본 전선들은 제대로 전진하지 못했다.
전투가 진행되면서 이순신 휘하 막하 장수들은 생사를 도외시한 채 적극적으로 참전하였다.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 순천부사 우치적, 안골포만호 우수, 사도첨사 이섬 등의 활약이 돋보였다.
한편 이 해전에서 이순신과 진린은 상호 상대방을 위급한 상황에서 구원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한 때 이순신의 배가 적을 쫓아 적 함열 깊이 돌진할 때 적선의 좌우로 쳐들어와 포위하려 하자, 진린의 배가 급히 달려와서 대포와 활로써 이 적선을 물리쳤다. 마찬가지로 적이 진린의 배를 세 겹으로 포위한 채 화살과 조총을 집중적으로 쏘면서 배에 뛰어들려하자, 이순신과 우수, 이섬은 일본군의 배에 불이 붙게 하여 진린의 배를 구원하였다.
명나라 부총병 등자룡은 70세의 노장으로, 조선의 판옥선 1척을 빌려 타고 전투에 임하여 수없이 많은 적을 죽였다. 그러다가 혼전의 와중에 뒤에서 쏜 명나라 포탄이 잘못 맞아 그가 탄 배 중앙에 불이 났지만, 그의 군사들은 한 곳에 모여 불길을 피하면서 싸웠다. 이때 적병이 함상으로 뛰어 올라와 백병전을 벌인 끝에 등자룡이 중상을 입게 되고 부하들도 다수가 부상을 당하였다.
마침 해상에는 북서풍이 강하게 불어왔고 조•명연합수군은 바람을 등진 채 화공전을 구사하였다. 적함에 불길이 솟아 바닷물도 붉게 물들었는데, 경상우수사 이순신(李純信)이 적선 10여 척을 불태우는 전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명나라 장수들도 적극적으로 참전하였다. 유격장 계금은 예교성 전투에서 부상당한 왼팔을 동인 채 바른 손에 미첨도를 들고 적 7명을 참살하였다. 부총병 진잠(陳蠶)은 진린의 배를 호위하는 중에도 적함에 호준포와 위원포를 쏘아댔고, 적중하는 소리가 먼 바다에까지 들릴 정도였다.
이러한 진격이 지속되자 마침내 견디지 못한 적이 드디어 도망치기 시작하였는데, 관음포 내항을 외해로 오인한 가운데 몰려 들어가게 되었다. 동이 트기 전이었다. 이순신이 가장 선두에 서서 적을 몰아넣었고 해남현감 류형과 당진포만호 조효열, 그리고 진도군수 선의문과 사량만호 김성옥의 배들이 그 뒤를 따랐다.
관음포에 갇힌 일본함대는 조•명연합수군의 화포공격에 좋은 표적이 되었다. 조선 수군의 여러 배에서 지자, 현자, 승자의 각종 총통을 일시에 집중 사격하자 일본군의 패색이 점점 짙어갔다. 포구 안에서 진퇴유곡에 빠진 일본군은 궁지에 몰린 쥐처럼 최후의 발악으로 총 역습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그림4-24] 노량해전 상황도1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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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해전 상황도 |
이러한 혼전과 격전이 진행되던 중 어느새 날이 밝기 시작하였다. 관음포 내에 갇힌 일본군과 후미의 응원군이 필사적으로 조선 수군에게 대응하였고, 이순신은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 이순신의 죽음을 감춘 조선 수군 지휘부는 여세를 몰아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계속 하였다.
전투는 사시(巳時, 09:00-11:00)까지 치열한 격전이 계속 되다가 정오 무렵에 상황이 종료되었다. 이 전투로 조•명연합수군은 일본군선 200척을 분멸시키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이 관음포 앞에서 치열한 격적을 벌일 때, 고니시는 묘도 서쪽 해상을 통해 남해로 빠져 나가 도주하였다. 그리고 부산, 울산에서 오는 구원군과 합류하여 일본으로 건너가고 말았다.([그림4-25] 노량해전 상황도5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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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해전 상황도 |
시마즈의 기함은 반파상태가 되어 창선도를 거쳐 동쪽으로 간신히 달아났고 나머지 일본군은 바다로 뛰어내려 겨우 헤엄쳐 남해도에 기어 올라 잠복하고 있다가 뗏목을 만들어 타고 창선도로 향하였다. 조•명연합수군은 그들이 버리고 간 배를 모두 불태우고 포구를 봉쇄하였다.
(3) 해전의 의미
노량해전에서 조•명연합수군은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격전을 벌인 일본 300여 척 중 온전하게 도주한 적선은 50여 척에 불과했고, 200여 척이 분멸되었다. 근접전으로 치러진 전투였기에 조•명연합수군의 피해도 상당수 발생하였다. 조선 수군은 함평의 전선을 비롯한 4척이 분멸되었고, 명 수군은 등자룡의 전선을 포함하여 2척이 분멸되었다.
일본군은 장수급만 30여 명이 전사하는 등 인명피해가 매우 컸다. 조선 수군도 이순신을 비롯한 10명의 장수들이 전사하였고 아울러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조선 수군의 장졸들도 다수 희생되었다. 명 부총병 등자룡 및 진잠의 부장 도명재(陶明宰)도 전사하였다.
아울러 노량해전에서 공을 크게 세운 자는 도원수 권율의 보고에 의하면, 전투에 참가한 조선 수군의 장수 중 우치적, 이섬, 우수, 류형, 이언량의 공이 가장 컸으며, 전선 중에서는 이순신이 타고 있던 배가 공이 가장 컸다는 점을 보고하였다.
여기서 흥양수군의 활약상을 살펴보면, 노량해전에서 흥양 수군은 큰 활약을 했지만 전투 편제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아 어떤 전과를 거두었는지는 알 수 없다. 더욱이 통제사 이순신이 전사함으로 정확한 전황보고서가 없는 까닭에, 어떤 인물이 구체적으로 어떤 활약을 펼쳤는지를 알 수 없다. 다만 다른 기록에 부분적으로 드러나는 흥양 수군에 대해 그 활약상을 추정할 뿐이다.
노량해전 직전의 전투 편제에서 노량해전에 참가한 흥양수군 장수는 흥양현감 고득장, 전 현감 최희량, 사도첨사 이섬, 발포만호 소계남, 흥양 출신 군관 송희립 등이다.
여기서 흥양현감 고득장은 1598년(무술년) 8월에 최희량의 후임으로 흥양현감에 제수되었고, 노량해전에서 분전하다가 전사하였다. 최희량은 1598년(무술년)에 파직된 후 이순신의 군관으로 남아서 노량해전에 참가하여 활약하였다.
사도첨사 이섬(李暹)의 자는 자명(子明)이며, 본관은 용인이다. 내금위에 소속되어 있다가 1583년(선조 16) 무과 별시에서 병과(丙科) 39위(76/500)로 합격한 인물이다. 발포만호 소계남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군관 최희량은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탄 기함에서 크게 활약하다가 이순신이 적탄에 맞아 전사한 후 사후 처리를 잘하여 승리에 큰 기여를 하였다.
특히 『은봉전서』에 보면 이순신이 전사했을 때 장좌(將佐) 몇 사람과 가족, 송희립 등이 알았고, 송희립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선조실록』에서도 형조좌랑 윤양이 “노량의 전공은 모두 이순신이 힘써 싸워 이룬 것으로서, 불행히 탄환을 맞아 군관 송희립 등 30여 인이 상인(喪人)의 입을 막아 곡성을 내지 않고 재촉하여 생시나 다름없이 영각(令角)을 불어, 모든 배가 주장의 죽음을 알지 못하게 함으로써 승세를 이루었다. 이와 같이 노량해전에서도 흥양 수군과 흥양 출신 인물들의 활약상이 컸음을 알 수 있다.
3) 종전과 흥양 수군에 대한 평가
노량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은 종식되었다. 당초 일본군은 11월 15일까지 전 병력을 부산에 집결시켜 일본으로 철수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고니시 군이 예교성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자 20일이 넘도록 철수를 연기하고 있었다. 고니시 군이 부산에 합류하자 일본군은 24일부터 순차적으로 철군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대마도-일도를 거쳐 12월 중에 모두 하카다(博多)에 도착하였으며, 이곳에 상륙한 후에야 도요토미의 사망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로써 넓게는 임진왜란, 좁게는 정유재란이 종전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이 조선의 확실한 승리에 의해 끝난 것이 아닌, 일본의 국내 사정에 따라 일본군의 철수로 종전되었기에, 조선은 일본의 재침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따라서 1609년의 기유약조(己酉約條)가 체결되어 일본과 공식적인 관계 복원이 이루어지기까지 약 10년간은 준전시와 다름없는 기간으로 인식되었다. 이 기간 조정은 전쟁의 후유증을 치유하고 일본의 재침을 예상하여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면서 전쟁에 대비하였다. 특히 수군력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수군 위주의 방어대책을 강구하는데 집중하였다.
한편 임진왜란이 종전된 지 3년째 되던 1601년에 조정에서는 전공을 세운 자들에 대한 보상을 추진하였다. 선조의 의도가 반영된 가운데 공신 선정 논의를 한 결과 선무공신 명단을 확정하여 발표한 것은 1604년 6월 25일이었다.
선무공신 1등은 이순신, 권율, 원균 세 대장이었고, 2등은 신점(申點), 권응수(權應銖), 김시민(金時敏), 이정암(李廷馣), 이억기(李億祺)이었으며, 3등은 정기원(鄭期遠), 권협(權悏), 유사원(柳思瑗), 고언백(高彦伯), 이광악(李光岳), 조경(趙儆), 권준(權俊), 이순신(李純信), 기효근(奇孝謹), 이운룡(李雲龍)이었다. 이들에게는 각각 관작(官爵)을 내리고 군(君)으로 봉했는데 모두 18인이었다.
선무공신에 책록되지 못한 공로자들은 이듬해인 1605년 4월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총 9,060명이 선정될 때 추가 책록되었다.
수군에 대한 조정의 긍정적 인식은 삼도수군 전체에 해당되겠지만, 세부적으로 보면 이순신이 이끈 전라좌수군이 핵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전라좌수군은 임진왜란 첫 전투부터 마지막 노량해전까지 전투에 참가하였다. 중간에 원균이 이끌고 싸웠던 칠천량해전에서는 궤멸적인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여기서 살아남은 전라좌수군은 다시 이순신 휘하에서 명량해전부터 노량해전까지 참전하였다. 전라좌수군의 절반은 1관 4포로 대변되는 흥양 수군이었음을 감안할 때 임진왜란을 극복한 주역은 곧 흥양 수군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참고문헌
1.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 이순신 저, 노승석 역주
2. 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 1권, 2권 이민웅, 정진술, 양진석, 김경숙, 노영구, 이현진, 김남기
3. 임진왜란 흥양해전사 2016 연구 제장명, 고용규, 송은일, 김병륜, 송호철, 윤여석
4. 임진왜란과 흥양수군 2015 연구 제장명, 송은일, 정진술, 신윤호, 한성일, 송철환, 송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