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임진왜란과 흥양수군(興陽水軍)

5. 수군 정비와 명량해전의 승리

녹도진 2025. 1. 13. 12:55

5. 수군 정비와 명량해전의 승리

 

  1) 수군력 정비 과정과 흥양 수군

1597716일 조선 수군은 칠천량해전에서 통제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및 여러 장수를 잃게 되고, 전라좌수군의 절반을 차지했던 흥양 수군도 비극적인 참패를 당했다. 이러한 전황 보고는 당시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에게도 전해졌다.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과 대책을 강구했지만 뾰쪽한 수가 없었으므로 직접 해안 지방으로 가서 확인한 후에 대책을 강구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군관 9(송대립, 유황, 윤선각, 방응원, 현응진, 임영립, 이원룡, 이희남, 홍우공)과 함께 718일부터 722일까지 노량에서 거제 현령 안위, 영등포만호 조계종, 군사 및 백성, 경상 우후 이의득, 경상우수사 배설과 만나 전황을 파악하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23일 전황 공문을 작성하여 흥양 출신 군관 송대립을 통해 권율 원수부에 전했다.

 

이를 계기로 다시 이순신은 83일 진주시 원계리에서 선전관 양호(梁護)로부터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는 임금의 교서(敎書)와 유서(諭書)를 받게 되었고 120일간의 백의종군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순신은 83일 통제사 교서를 받자마자 전라도 쪽으로 서진하였다. 이순신이 전라도로 서진한 것은 아마도 이전에 수군 지휘관들과 약속을 했거나 새로운 병력 충원의 필요성을 감안하여 경상도보다는 전라도 좌수영 관하가 낫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이순신은 육로를 이용하여 구례(8.4), 곡성(8.5), 옥과(8.6), 석곡(8.7), 순천(8.8), 조양창(8.9-8.10), 보성(8.11-8.16), 군영구미(8.17), 회령진(8.18-8.19), 이진(8.20-8.23), 어란진(8.24-8.27), 장도(8.28), 벽파진(8.29-9.14), 우수영(9.15-9.16)에 이르러 명량대첩을 이루었다.

조선수군 재건길

 

구례와 곡성에서는 정보를 수집하여 전략을 수립하였고, 순천에서는 무기를 구하고, 조양창에서는 군량미 600석을 구했다. 보성에 이르러서는 자원 병력이 120명으로 증가하였다.

명량해전을 한 달여 앞둔 시점에서 이순신의 휘하에 모여든 인물에 대해 난중일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순신과 함께 임진왜란 초기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던 전라좌수군의 지휘부 인사들인 배흥립송희립최대성김붕만이기남 등이 다시 그 휘하에 합세하였다. 이 시기 이순신 휘하에 들어온 인물들은 대부분 흥양 출신이거나 흥양에서 활동한 인물이었다.

 

아울러 중 혜희(惠熙)와 같은 의병 지휘부 인물은 유사시 의병들을 규합하여 이순신의 작전을 도왔고, 정사준을 비롯한 무기 제조의 전문가들은 부족한 무기류를 확보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렇게 816일까지 보성에 머무르면서 거제현령 안위와 발포만호 소계남 등 역전의 용장들도 휘하에 모여들었다.

 

명량해전 당시 조선 수군이 보유한 전선은 판옥선 13척과 초탐선 32척이 전부였다. 이중 전투력을 갖춘 전선은 판옥선 13척뿐이다. 당초 배설의 관하 10여 척을 제외하고 전멸한 것으로 추정되었던 수군 세력이 수십 척이나 경상도 연해 지역에 표류하고 있다는 사실과 전투에 참전하지 않은 병력 상당수가 창선도에 운집되어 있었다. 다만 전선을 운행할 군사가 없어 무군선(無軍船)들만 산재했던 것이다. 이를 서진하면서 군사들을 모아 정비해 나갔다.

 

명량해전 한 달 전, 조선 수군의 전선은 모두 12척이 확보되었는데, 배설이 최초로 가져온 배는 8척이었고 4척은 중간에 수습되어 회령포에서 12척이 되었다. 이중에는 녹도만호 송여종이 이끄는 녹도선 1척이 포함되었다.

한편 전선이 13척으로 늘어난 시기는 826일경으로 김억추가 전라우수사로 부임해 올 때 거느리고 온 전선 1척이 추가되어, 13척의 전선이 확보되었다.

 

순천과 보성을 거치면서 모집한 군사는 물론 군량과 군기류를 회령포에 집결시켜 818일 배설이 이끌고 온 전선 12척에 탑재하였다.

 

이러한 군수물자의 확보와 관련하여 당시 전황을 이끌고 있던 전쟁 지도부와도 어느 정도 유기적인 협조관계를 유지하였다. 조선 수군이 벽파진에 유진하기 시작한 829일부터는 자체적인 군수물자 수습과 더불어 상부와의 군수물자 조달 체계도 확립하고 있었다. 특히 조선 수군은 제주도와 유기적인 협조 체제를 유지하며 명량해전 직전까지 군비 체계를 정비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2) 명량 해전과 흥양 수군

(1) 해전의 배경

조선 수군이 통제사 이순신의 주도 하에 병력충원과 군비체제를 정비하고 있을 무렵인 914일에 탐망군관 임준영(任俊英)이 일본군선 200여 척 중 55척이 먼저 어란 앞바다에 도착했다고 보고하였다. 이어서 적의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온 김중걸(金仲乞)의 보고에서는 지난 97일에 있었던 접전에서 피해를 입은 일본군이 복수하기 위하여 조선 수군을 섬멸한 뒤 서울 한강으로 올라갈 것이라고 하였다.

 

토도 다카도라 등이 거느린 일본 수군은 8월 하순경에 하동현 섬진강 하구를 출발하여 97일 어란포에 진출하였다. 정보를 받은 조선 수군은 당시 우수영 앞 해상에 머물러 있던 피란선을 육지로 대피토록 지시하였다. 이는 곧 전투가 벌어질 시점에서 피란민들의 안전을 도모함과 동시에 조선 수군이 그곳에 유진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튼날인 915일 조선 수군은 진을 우수영으로 옮겼다 그 이유는 명량이라는 천험의 요새지 특성을 잘 활용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점을 감안할 것이다.

 

한편 당시 참전한 수군 전력은 조선이 전선 13척에 초탐선 32척이었고, 일본군의 전선은 총 200여 척으로 명량 수로에 진입하여 조선 수군과 접전을 벌인 일본 수군의 전선은 130여 척이다. 이때 진입하지 않은 적선 70여 척은 해협 입구 쪽에 대기하고 있었다.

 

(2) 해전의 경과

난중일기정유년 916일 기사에 보면 이른 아침에 망군이 보고하기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선이 명량을 거쳐 곧바로 진치고 있는 곳으로 온다.”고 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을 불러 군령을 하달한 후 정박해 있던 배들을 이끌고 바다로 나갔다.

 

조선 수군이 포진한 장소는 [그림 3-4] 명량해전 상황도와 같이 양도를 최전방으로 하여 포진하였다.

일본의 전략은 서해상으로 진출하는 것이 1차 목표였다. 마찬가지로 조선 수군 역시 일본 수군이 명량 수로를 넘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에 전략적 목표가 있었다.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조선 수군을 격멸시킨 후 전라도를 확실하게 확보하려고 했다. 이럴 경우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의 접전이 불가피했으니, 조선 수군으로서는 일본 수군을 섬멸하는 방법을 강구했고, 가장 승리할 수 있는 포진 지점으로 [그림4-15]의 장소가 적합했다.

명량해전 상황도

 

탐망군의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휘하 장수들을 소집하여 사전 약속된 전술을 강조한 후 전투해역으로 진입하였다. 이때 조선 수군 지휘부는 적선이 조선 전선의 10배 이상 되는 대규모이므로 피난선 100여 척을 동원하여 후방에서 포진하도록 하였다. 일종의 의병전술(義兵戰術)인 것이다. 아울러 휘하 13척의 전선 중 12척은 명량해협을 가로질러 일자진(一字陣)을 형성하였고, 이순신 대장선은 최선봉에서 일본 함대와 접전을 벌였다.

 

조선 수군이 일본군과 접전을 벌인 시각은 오전 8시 경이었다.

명량해전 당일 전투 상황을 난중일기를 토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 수군이 포진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일본군선 130여 척이 순류를 타고 명량 수로를 넘어와 조선 함대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이러한 적의 망강한 세력에 질린 휘하 장수들은 조수(潮水)를 따라 자꾸만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전투 초기에 휘하 전선들은 뒤로 물러난 가운데 이순신 대장선만 선봉에서 홀로 버티면서 화포를 쏘며 교전할 뿐이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이순신이 휘하 장수들을 호출하자, 거제현령 안위(安衛)의 전선이 가장 먼저 도착하였다. 안위의 전선에 이어 도착한 중군장 김응함(金應諴)의 전선이 적진 속으로 돌입할 때 일본군 장수가 탄 적선이 휘하 2척과 함께 안위의 전선을 공격하였다. 적선 3척이 안위의 전선에 개미 떼처럼 달라붙어 위태로운 광경이 되었다. 안위 배의 군사들은 등선하려는 일본군을 맞아 몽둥이와 장창(長槍), 수마석(水磨石) 덩어리 등으로 적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이어서 통제사의 대장선과 녹도만호 송여종(宋汝悰), 평산포 대장 정응두(丁應斗)의 전선이 잇달아 협력하여 적을 섬멸하였다. 바다에 빠진 일본군 장수를 항왜(降倭) 준사(俊沙)마다시장수임을 보고하자, 그를 건져 올려 효수하고 적에게 보이니 그 기세가 크게 꺾였다.

 

이후 13시경에는 조류가 남동류로 바뀌면서 조선 수군에게 유리한 형세가 되었다. 조선 수군은 사기가 충전하여 계속 대포를 쏘아 적선을 격침시켰다. 한편 15시가 넘어서부터 조류가 최강류로 흐르고 북풍도 강하게 불어와 바람을 이용하여 화공전을 전개하였다. 이후 일본군선이 조류를 따라 수로 입구로 완전히 물러나면서 해전은 종료되었다.

해전 결과 일본 수군의 전선 31척이 완전히 분멸되었으며, 다수의 전선이 파괴된 채 일본군은 남해상으로 후퇴하였다. 이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전선은 1척도 분멸되지 않았다. 다만 근접전을 수행함으로써 수군과 의병을 포함하여 다소의 인명 피해는 발생하였다. 아울러 일본군 장수 중 쿠루시마((來島通總)가 사망하고 토도(藤堂高虎)를 비롯한 일부 장수들이 부상을 입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명량해전에서 흥양 수군은 구체적으로 누가 참전하였고 어떤 전과를 거두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어서 알 수 없다. 다만 그동안 수군 정비 과정을 통해 이순신 휘하로 몰려든 인물들, 즉 녹도만호 송여종, 송대립, 송희립, 유황 등과 발포만호 소계남 등이 당연히 참전했고, 전체 조선 수군이 거둔 승리 중 흥양 수군이 일정 부분을 담당했다. 특히 송여종은 이순신이 장계에 직접 언급할 정도로 그 전공이 탁월하였다.

흥양현감 최희량도 이 해전에 참전했다. 선전관으로 근무하던 최희량이 활솜씨를 인정받아 임금의 특명으로 흥양현감직을 맡았으며, 명량에서 첫 번째 승리를 거뒀다는 기록이 있다.

 

(3) 조선 수군의 전술과 승리 요인

그러면 조선 수군이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고 일본 수군을 물리친 요인은

 

첫째, 전선과 무기의 위력을 들 수 있다. 명량해전 시 조선 수군이 보유한 전선은 판옥선 13척과 초탐선 32척이 전부였다. 이중 전투력을 갖춘 전선은 판옥선 13척인 반면 일본 전선은 130여 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수군의 판옥선은 1척도 분멸되지 않았고 일본 전선만 31척이 분멸되고 많은 전선이 파괴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조선 수군의 전선과 무기의 위력이 일본보다 우수함을 피력하고 있다.

이와 같이 당시 조선 수군의 전선은 비록 판옥선 13척에 불과했지만, 일본 전선에 비해 그 기능이 매우 우수하였다. 아울러 해전에 참전한 일본 수군도 대장선을 제외하고 대부분 세기부네(관선, 關船) 위주로 편성한 것도 조선 수군이 승리한 요인이라 볼 수 있다.

 

둘째, 수군 지휘관 이순신의 리더십이 뛰어난 점을 둘 수 있다. 해전 당일 이순신은 자신이 탄 대장선을 맨 앞에 포진시키고 그 뒤에 부하들의 전선 12척을 일자진으로 포진시켜 적을 맞았다. 이순신은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여기서 그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산다.’고 전일 강조한 말을 직접 실천해 보인 것이다. 이순신이 노린 효과는 두 가지로 생각된다. 한 가지는, 일본 수군들과 싸움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것을 부하들에게 솔선하여 가르쳐 준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지휘관이 이렇게 분전하는데 부하들이 도망쳐서야 되겠느냐는 최책감을 일깨워 준 것이다. 그의 이러한 행동이 부하들에게 전투의지를 한층 고양시켜 결과적으로 승리를 이끌어 냈다.

 

셋째, 조선 수군이 구사한 다양한 전술을 들 수 있다. 이것 역시 지휘관의 능력에 기인한 것이지만 조선 수군 자체의 전술 구사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조선 수군이 진을 친 곳은 유속이 3노트 정도 흐르는 양도 뒤편 해상이었다. 진을 치는 곳으로 이동하기에 문제가 없었지만 진을 친 장소에 도착한 후 그 진을 유지하는 방법이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모든 전선을 일자진(一字陣)으로 형성시킨 후 닻을 내리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이분의 행록과 이민서(李敏敍)명량대첩비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수군이 진을 친 형태가 일자진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여러 가지 목적이 내재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테면 일본군을 통과시켜 주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고, 화포의 위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일본 수군의 전투 공간을 제한다는 점이다. 이것의 효과는 무엇보다 일본군의 전선 수가 많아도 좁은 수로에 갇혀있는 형국으로 전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없게 했다는 데 있다. 그러다 보니 조선 수군 13척이 대등한 숫자의 일본 전선과 각개 전투를 벌이는 효과를 초래하였다.

 

적 대장선과 선봉선에 대한 집중공격으로 적군의 사기를 꺾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조류와 바람을 이용한 화공전을 적절하게 구사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전투가 치열해진 중반 이후에 주로 채택한 전술이었다. 일본군은 그들의 주 전술인 등선백병전(登船白兵戰)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것은 조선 수군의 판옥선이 고대견고(高大堅固)하여 등선하기가 어려운 점과 조류의 영향으로 인해 조선의 전선을 전() 방위로 포위할 수 없었다는 데 있다.

 

넷째, 의병들의 참전이다. 의병들의 경우 명량수로의 북서단 쪽에 100여 척의 향선에 승선하여 조선 수군을 지원하였다. 이순신이 이들을 동원한 것은 원래 아군의 성세를 돋워 적들을 기만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마하수는 조선 수군의 진형을 뚫고 해협의 북서쪽 입구 쪽에 도착한 일본 군선을 맞아 직접 전투를 벌여 전사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러한 전투 행위를 포함하여 후방에 포진한 의병들의 주 활동은 조선 수군의 성세를 북돋우면서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임무였다. 명량해전 때 피난민의 우두머리로서 이순신의 작전에 호응했던 인물로는 장흥해남영암흥양 등지에서 온 마하수백진남김성원문영개변홍원백선명김택남임영개김안방백송호정운희 등이 있었다.

 

그리고 향선의 의병지도자 중의 일원이었던 오익창(吳益昌)은 본진과 피난선단 사이를 왕래하면서 의곡(義穀)을 전달하고, 동과(冬瓜, 동아)를 공급하여 수군의 갈증을 풀어주기도 하였으며, 솜이불을 모아 물에 적신 다음 적의 철환을 막게 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많은 피난민들은 수군 지휘부의 적을 피하라는 명령에도 인근지역을 떠나지 않고 군량이나 군복을 조달하거나, 피란선을 이용하여 세력이 강하게 보이는 등 응원전을 펼치기도 하였다. 전투가 끝난 후 피란선 300여 척에서 모여든 백성들과 나주 진사(進士) 임선임환임업 등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군사들에게 군량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3) 명량해전 직후의 수군 운용

명량해전 직후 일본 수군의 상황과 조선 수군의 행적은 어떠했을까? 명량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

명량해전 이후 일본군은 서해안 남쪽까지 진출하여 조선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고 있었다. 조선 수군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했지만 남해상의 제해권을 되찾을 정도는 아니었다. 명량해전에서 물러난 일본군은 수백 척의 본 세력을 정비한 후 다시 서진하여 전라도 서남해안 지방을 유린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다시 무안 앞바다까지 진출했지만 시기적으로 겨울이 다가오면서 해상활동 시기를 놓치게 되었다. 동시에 일본군 내부 사정 등을 고려하여 전라도의 동쪽 해상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명량해전 직후 조선 수군의 이동경로

 

이러한 전황에서 조선 수군의 행적을 살펴보면, 명량해전이 끝난 후 조선 수군은 야음을 틈타 당사도(9.16)로 옮겨 밤을 지낸 후 어외도(9.17-9.18)에서 2일간 머문 뒤 칠산도와 법성포를 거쳐 홍농(9.19)에서 밤을 지냈다. 이어 고참도(9.20)를 거쳐 고군산도(9.21)에 도착하여 머물렀다. 이곳에서 12일간 머무르면서 통제사 이순신은 명량해전 결과에 대한 상황 보고를 하였고, 인근 지역 관료들과의 만남을 통해 수군 활동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아울러 당시의 전황에 대한 정보도 입수하였다.

 

조선 수군이 명량해전 후 고군산도까지 올라간 이유는 일본군 동향 파악과 인력 규합, 월동 지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이동했다조선 수군이 서해상을 북상한 실질적인 이유는 일본 수군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조선 수군은 전선 13척과 초탐선 32척으로 명량해전에서 승리했지만 명량해전에 참전한 일본군 세력은 선발대에 불과했다. 주력 수백 척과 다시 맞붙을 경우 전투의 승산을 기약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전선 수도 열세지만 철환과 궁시 등 군수물자들이 고갈되었고, 전사자도 다수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장졸들이 지쳐있는 상태임을 감안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고군산도까지 북상한 후 당시 육지의 전황을 고려하여 남하하게 된다.

 

조선 수군은 103일에 고군산도를 출항 후 변산을 지나 법성포에 도착해 5일간 머무르고 108일에 어외도에서 밤을 보냈다. 109일에 우수영에 도착하여 인근지역이 황폐화된 사실을 확인하고 머물기가 여의치 않아 다시 배를 출항하였다. 1011일에 안편도에 도착하여 18일간 머물면서 현안 문제 해결과 향후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리고 1029일에 목포 앞바다에 위치한 고하도로 진을 옮기게 된다.([그림4-17] 참조)

고하도 삼도수군통제영의 위치

 

명량해전 직후 조선 수군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은 군사의 확보와 군량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집단으로 몰려다니는 피란선들은 군사와 군량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따라서 임시적으로 군사를 확보하고 군량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면서 동시에 조선 수군이 겨울철을 안전하게 주둔할 장소를 구하는 데 노력을 집중하였다. 그 결과 월동 장소로 구한 곳이 바로 목포 앞에 있는 고하도였다. 1029일부터 고하도에 이진한 조선 수군은 이곳에서 월동하면서 본격적인 수군력 재건 노력을 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1.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 이순신 저, 노승석 역주

2. 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 1, 2권 이민웅, 정진술, 양진석, 김경숙, 노영구, 이현진, 김남기

3. 임진왜란 흥양해전사 2016 연구 제장명, 고용규, 송은일, 김병륜, 송호철, 윤여석

4. 임진왜란과 흥양수군 2015 연구 제장명, 송은일, 정진술, 신윤호, 한성일, 송철환, 송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