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도진 2025. 1. 13. 12:33

4. 장림포부산포해전

 

조선 수군은 제4차 출전에 앞서 81일부터 전라좌우도 수군이 좌수영에 미리 합류하여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때 전라좌우도의 대소 전선은 모두 166척으로 전선이 74, 협선이 92척으로 구성되었다. 이순신은 전선 수의 증가와 사전 훈련뿐만아니라 지휘부의 인원 보강도 추진하였다. 그중 가장 주목할 부분은 흥양 출신 수군 조방장 정걸(丁傑)을 대동한 사실이다. 정걸은 당시 80세에 가까운 고령의 노장이었다. 원거리에 있는 적의 소굴화가 된 부산포 본진을 치는 출전은 매우 위험하고 중요한 작전이었기 때문에 정걸 같은 수십 년의 해전 경험과 전략 전술 구사에 능한 그의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한 조선 수군은 1592824일 전라좌수영을 출항하여 첫날은 남해 땅 관음포에 잠시 머물렀다가, 자정 무렵에 다시 항해하여 사천의 모자랑포에 정박하였다. 이어 25일에는 사량 앞바다에서 원균의 경상우수군 전선 10여 척과 합세한 후 당포 앞바다로 이동하여 정박했다.

826일은 비바람이 몰아쳐 발선을 하지 못하다가 날이 저물녘에 거제도의 자을우치(資乙于赤)에 이르러 밤을 이용하여 견내량을 건너고 27일은 웅천땅 원포에서 밤을 보냈다.

 

 

  1) 장림포 해전의 승리

1592828일 이른 아침에 발선하여 양산과 김해의 두 강 앞바다로 향하였는데, 창원땅 구곡포의 포작 정말석이라는 사람이 김해강에서 도망쳐 들어와서 말하기를, “김해강에 머물고 있던 적선이 며칠 동안에 몰운대 바깥 바다로 급히 나갔다.”고 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가덕도 북변의 서쪽 기슭에 배를 감추어 숨어 있게 하고 방답첨사 이순신과 광양현감 어영담을 가덕 외면에 잠복하게 하였다. 동시에 양산의 적선을 탐망해보았지만 흔적이 없으므로 조선 수군은 천성 선창으로 가서 밤을 지냈다.

 

829일에는 새벽에 발선하여 날이 밝을 무렵에 두 강 앞바다에 도착했다. 동래 땅 장림포 바다 가운데에서 낙오된 왜적 30여 명이 대선 4척과 소선 2척에 나누어 타고 양산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경상우수사가 거느린 수군들이 도맡아 쳐부수고 불태웠으며, 좌별도장 우후 이몽구도 대선 1척을 쳐부수었다. 이를 장림포해전이라고 부른다.

이어 어두워질 무렵에 가덕 북변으로 되돌아와서 밤을 지냈다.

 

  2) 서전(緖戰)과 부산포 해전의 승리

이순신은 원균 및 이억기 등과 함께 밤새껏 의논하여 91일 새벽에 발선하였다. 조선 수군 함대는 아침 8시경 몰운대를 지났는데, 이때 강한 동풍과 큰 풍랑이 일어 간신히 함대를 수습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함대는 동쪽으로 전진을 계속하여 화준구미에 이르러 대선 5, 다대포에서 대선 8, 서평포에서 대선 9, 절영도 앞바다에서 대선 2척을 각각 만났다. 이들은 모두 언덕에 의지하여 줄지어 대고 있었는데, 3도의 수사가 거느린 여러 장수와 조방장 정걸 등이 합력하여 남김없이 쳐부수고 배 안에 가득 실은 일본군의 물건과 전쟁기구도 모두 불태웠다.

 

이후 다시 절영도 주변을 수색하였으나 일본 함대를 발견하지 못한 조선 함대는 작은 배를 보내 부산포를 정탐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부산포에 일본 군선 500여 척이 선창의 동쪽 산기슭의 언덕 아래에 줄지어 있는데 선봉 왜대선 4척이 초량목으로 나오고 있다고 하였다. 이에 원균과 이억기 등과 약속하기를, “우리의 군세로써 만일 지금 공격하지 않고 군사를 돌이킨다면 반드시 적이 우리를 멸시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하고 독전기를 휘두르며 달려갔다. 이에 우부장 녹도만호 정운, 귀선돌격장 군관 이언량, 전부장 방답첨사 이순신, 중위장 순천부사 권준, 좌부장 낙안군수 신호 등이 먼저 돌진하여 선봉 대선 4척을 우선 깨뜨리고 불태웠다. 뒤에 있던 여러 배들은 곧 이긴 기세를 타서 깃발을 휘날리고 북을 치면서 장사진(長蛇陣)’으로 돌진하였다.

 

부산포에 도착해 보니 부산성 동쪽 한 산에서 5리쯤 되는 언덕 밑 3개소에 일본군선 470여 척이 정박해 있었다. 여러 전선들이 곧장 그 앞으로 돌진하자 배 안과 성 안, 산 위, 굴 속에 있던 적들이 총통과 활을 갖고 산으로 올라가 6개 처에 나누어 결진하고 내려다보면서 철환과 화살을 빗발과 우박같이 쏘았다.

 

이를 본 장수들은 더욱 분개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다투어 돌진하며 천자지자총통과 장군전피령전장편전철환 등을 일시에 발사하며 하루 종일 교전하였다. 결국 적선 100여 척을 3도의 여러 장수들이 힘을 모아 깨트렸다. 화살에 맞아 죽은 적군의 수를 헤아릴 수 없었으나 배를 쳐부수는 것이 급하여 머리를 벨 수 없었다.

부산포해전 상황도

 

날이 저물어 적의 소굴에 머물러 있다가는 앞뒤로 적을 맞게 될 환란이 염려되어 하는 수 없이 배를 돌려 한밤중에 가덕도로 돌아와서 밤을 지냈다.

 

접전한 다음 날 또 다시 돌진하여 적선을 모조리 깨트리려고 하였으나 위로 올라간 적들이 여러 곳에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의 퇴로를 차단한다면 궁지에 빠진 적들이 최후 발악할 염려가 있었다. 결국 일망타진할 방법은 수륙으로 함께 진격하는 길뿐이었다. 이순신은 수군의 힘만으로 일본군을 물리칠 수 없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더욱이 풍랑이 크게 일어서 전선이 서로 부딪혀 파손된 것이 많이 있는데, 이들을 수리하고 군량도 넉넉히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후일을 기약하고 92일 진을 파한 후 본영으로 돌아왔다.

 

부산포 해전을 포함한 제4차 출전 상황도에 대해서는 [그림4-13]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4차 출전(부산포해전 등) 상황도

 

 

3) 흥양 수군의 전과 및 피해

이번 부산포해전의 승리에 대해 이순신은 이렇게 표현하였다 무릇 전후 4차에 걸쳐 열 번 접전하여 모두 다 승첩하였어도 장수와 군졸들의 공로를 논한다면 이번 부산 전투보다 더 한 것이 없다. 전일 싸울 때에는 적선의 수가 많아도 70여 척을 넘지 않았는데, 이번은 대적의 소굴에 늘어서 있는 470여 척 속으로 군사의 위세를 크게 뽐내어 이긴 기세로 돌진하니, 조금도 두려워 꺾임이 없이 종일 공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쳐부수었고 적들로 하여금 마음이 꺾이고, 가슴이 무너지며, 머리를 움츠려 두려워 떨게 하였는데, 비록 머리를 벤 것은 없으나 힘껏 싸운 공로에는 먼저 번보다 훨씬 더 하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이날의 부산포해전은 80여 척의 적은 함대를 이끌고 약 6배에 달하는 대규모 세력에 맞서 싸운 해전이었다. 아울러 일본수군의 근거지를 공격한 의미있는 일전이었다.

 

<4-8> 4차 출전 흥양 수군의 전과

해전지 전투편제/소속 직책() 성명 전과(전선)
장림포(8.29) 좌별도장 우후 이몽구과 경사우수군 장수 대선 4, 소선 2
화준구미,다대포,
서평포,절영도(9.1)
조방장 정걸과 3도의 여러 장수, 대선 24
초량목(9.1) 우부장 녹도만호 정운과 전라좌수군 대선 4
부산포(9.1) 3도의 여러 장수들 적선 100여 척
총 계 134척 이상 분멸

 

그러면 이 해전에서 흥양 수군의 전과는 어떠했을까? <-8>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장수들의 전과가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그래도 정걸과 정운은 뚜렷한 전과를 보이고 있다. 특히, 정걸은 부산포해전 앞서 벌어진 서전에서 적의 대선 24척을 분멸시키는데 큰 기여를 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정운은 초량목에서 선봉에 서서 적을 물리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순신이 휘하 장수들의 전과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부산포해전에서도 흥양 수군의 활약상이 많고도 컸을 것임은 명약관화하다.

 

부산포해전에서 흥양 수군의 사상자는 얼마나 발생했을까? 다음 <2-1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전라좌수군의 전사자는 6, 전상자는 25명이 발생하였다. 전사자의 경우 6명 중 3명이 흥양 수군 소속이었다. 그리고 전상자 25명 중 7명이 흥양 수군 소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전과에 비해서 사상자 수가 상대적으로 적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흥양 수군 전사자 중 이순신의 핵심 참모인 녹도만호 정운이 전사하는 큰 손실을 입었다.

 

정운의 사망에 대해 이순신은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녹도만호 정운은 사변이 일어난 이래 충의심을 분발하여 적과 함께 죽기로 맹세하고 세 번이나 적을 칠 때 언제나 앞서 돌진하였으며, 이번 부산 접전 때에도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하다가 적의 대철환이 이마를 뚫어서 전사하였으니 지극히 참통(慘痛)하다.”라고 피력하였다. 그러면서 우리 국가가 오른팔을 잃었다.”고 비통해 하였다.

 

<4-9> 4차 출전 진별 사상자 현황

구분 각 진별 전사자 각 진별 전상자
4차 출전
(부산포)
본영선 2, 방답선 1, 사도선 1, 녹도선 1, 여도선 1
(합계 6) (흥양합계 3)
본영선 11, 보성선 2, 흥양선 1, 방답선 5, 사도선 4, 여도선 2
(합계 25) (흥양합계 7)

 

부산포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사상자 현황은 <4-10>(101쪽 부록 9 참조)과 같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부산포해전은 이전의 해전들과는 달리 일본수군의 근거지인 부산포를 공격했다는 점과 참전 규모와 그 전과가 임진년 해전 중에서는 가장 컸다는 점에서 해전사적인 의미가 크다.

 

또한 이전부터 일본수군이 조선 수군을 회피하면서 해전 때마다 도주를 일삼았지만, 부산포해전 이후에는 해안에 축성(築城)한 뒤 육상에서만 조선 수군을 상대하려는 해전회피 전법이 고착화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 수군이 일본수군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향후 수륙합공작전이 필요하였다.

 

이로써 1592년 한 해 동안, 4차례의 출전과 16회의 해전은 마무리되었다. 조선 수군이 임진년 초기 해전에서 거둔 전승은 전체 전국(戰局)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육전에서의 고전을 해상에서 설욕한 의미도 있었다. 또한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하여 일본의 수륙 병진 전략을 분쇄시킨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해상 보급로마저 위협받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일본수군은 해전을 포기한 채 해안 고지대에 왜성을 쌓아 주둔하면서 육군의 지원을 받아 조선 수군의 공격에 대비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도해하여 전쟁을 지휘할 기회도 무산시킴으로써, 일본군의 전쟁 지도력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전과를 거두게 된 것은 전라좌수군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고, 그 핵심은 흥양 수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1.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 이순신 저, 노승석 역주

2. 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 1, 2권 이민웅, 정진술, 양진석, 김경숙, 노영구, 이현진, 김남기

3. 임진왜란 흥양해전사 2016 연구 제장명, 고용규, 송은일, 김병륜, 송호철, 윤여석

4. 임진왜란과 흥양수군 2015 연구 제장명, 송은일, 정진술, 신윤호, 한성일, 송철환, 송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