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임진왜란과 흥양수군(興陽水軍)

1. 옥포•합포•적진포 해전(1차 출전)

녹도진 2025. 1. 13. 12:02

1. 옥포합포적진포 해전(1차 출전)

  1) 첫 출전을 주도한 녹도만호 정운 장군

조선 수군이 거둔 최초의 승리는 159257일에 있었던 옥포해전이다. 당시 전라 좌도지역을 지키고 있던 이순신이 어떻게 해서 경상도 거제지역까지 가서 전투를 하게 되었을까?

 

당시 조선의 국방체제는 제승방략체제였다. 각 도별로 나눠진 구역 안에서 적이 쳐들어 올 경우 그 도의 모든 병력이 집결하여 적을 막는 체제다. 그래서 경상도 지역에서 적을 방어할 때는 경상 좌도와 우도의 군사가 자동적으로 집결하여 적을 막아야 했다. 그러나 당시 경상 좌수군은 스스로 궤멸되었고, 경상 우수사 원균이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쟁을 맞다 보니 전쟁 대비가 제대로 되지 못했다.

 

전선의 수는 전라 좌수영보다 많았지만 병력이 없어서 운영을 할 수 없었고 전쟁이 나자 많은 군사가 도주하였다. 이때 전선 10여 척을 수습한 원균은 사실상 중과부적으로 물러나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원균 휘하 소비포 권관 이영남으로부터 구원을 요청받은 이순신은 경상도 지역으로 바로 달려갈 수 없었다. 관할 구역이 달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순신은 먼저 조정에 보고하여 출전해도 좋은지 여부를 묻고, 부하 장수들과 회의를 통해 의견을 나눴다. 이때 낙안군수를 비롯한 일부 장수들은 반대하였으나, 흥양현에 위치한 녹도만호 정운과 흥양 출신 군관 송희립 등이 적극적으로 출전하자는 의견을 밝혀 출전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었고, 때마침 조정으로부터도 출전 승낙이 떨어졌다. 이렇듯 전라좌수군이 경상도 지역으로 출전하게 된 것은 녹도만호 정운 장군이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이 보유한 전선은 주력군선 판옥선이 24척이고, 일본군선은 무려 90척이나 된다는데,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라 전라우수군이 오기를 기다려 같이 출전하려 했다. 전라 우수사 이억기도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출전 준비에 시간이 다소 걸렸다. 작전을 우회하여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좌수군이 먼저 출전하였고 그 뒤를 따른 경상우수군과 협조체제로 전투를 하게 된다.

 

경상우수군이 패퇴하면서 경상도 지역의 사정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이순신은 포작선 46척을 동원하였고, 이 포작선 46척 중에는 녹도 주변 바다를 비롯하여 흥양 해상에서 활동한 포작선이 대다수를 이루었다. 이순신이 이 포작선을 동원한 이유는 정보수집과 아군 사기진작의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포작들은 바닷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군의 동향을 수집할 수 있었고 그것이 정보가 되었다. 다른 한 가지는 일본군선의 숫자가 조선 수군의 전선보다 많은 것에 위축될 수 있어서 포작선 46척이 동원된 조선 수군의 규모는 외형적으로 볼 때 든든한 면이 있었고, 적군에게는 아군 세력이 강대하게 보이는 효과를 주었다.

 

  2) 옥포합포적진포 해전의 승리

159254일 새벽 전라좌수군은 판옥선 24, 협선 15, 포작선 46척을 거느리고 전라좌수영을 떠나 경상도로 출전하였다. 이후 경상도 당포에서 판옥선 4, 협선 2척을 거느린 원균의 경상우수군이 합류한 후 56일 밤을 거제도 송미포에서 보냈다. 다음날 57일 새벽에 발선하여 천성가덕으로 향하던 중 옥포만에 적선이 있다는 척후장의 보고를 받고 옥포만으로 진격하였다. 이때 전라좌수군의 전투편제는 <4-1>과 같이 구성되었다.

 

<4-1> 1차 출전시 전라좌수군의 편제

전투 편제 직책 및 성명 전투 편제 직책 및 성명
중위장(中衛將)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좌척후장(左斥候將) 여도권관 김인영((金仁英)
좌부장(左部將) 낙안군수 신 호(申 浩) 우척후장(右斥候將) 사도첨사 김 완(金 浣)
전부장(前部將) 흥양현감 배흥립(裴興立) 한후장(捍後將) 본영군관 최대성((崔大成)
중부장(中部將)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 참퇴장(斬退將) 본영군관 배응록(裵應祿)
유군장(遊軍將) 발포가장 나대용(羅大用) 돌격장(突擊將) 본영군관 이언량(李彦良)
우부장(右部將) 보성군수 김득광(金得光) 선봉장(先鎽將) 경상우도 변 장(邊 將)
후부장(後部將) 녹도만호 정 운(鄭 運)    

 

<4-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순신 자신이 이끈 전라좌수군은 휘하 55포의 세력을 중심으로 하면서, 부분적으로 경상도의 주요 장수들도 함께 전투를 수행하였다. 아울러 흥양현 지역에서 14포가 참여하였고, 전라좌수군 전력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였다.

 

조선 수군이 옥포만으로 진격했을 때 일본군선 30여척이 옥포 선창에 정박해 있으면서 포구를 분탕질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휘하 장졸들에게 침착하게 전투에 임할 것을 지시한 후 적선을 향해 접근했다. 조선 수군 함대를 발견한 일본 군선 중 6척이 다가옴에 따라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1592년 정오 무렵부터 역사적인 조선 수군의 첫 해전인 옥포해전이 시작되었다.

 

첫 전투이다 보니 일부 부하들은 이순신의 진격 명령에도 쉽게 나가지 못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으나, 후부장(後部將) 녹도만호 정운이 후방에 위치하고 있었음에도 분위기를 주도하며 전투를 수행하자, 이에 용기를 얻은 조선 수군의 적극적인 공세로 적을 물리치고 적선 26척을 분멸시킬 수 있었다.

 

전투 종료 후 거제도 영등포에서 쉬려고 하는데 적선 5척이 나타났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조선 수군은 적선을 추격하였고, 저녁 합포에서 일본군선 5척을 분멸시켰다. 이후 창원땅 남포에서 밤을 보낸 후 다음 날인 58일에는 적진포에서 적선 13척을 물리쳤다. 이로써 총 44척의 적선을 분멸시킨 것이 이순신이 제1차 출전 결과이다. 전투를 마치고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으로 돌아왔고, 원균의 경상 우수군은 섬진강 하류에 머물렀다. 이상 제1차 출전의 상황도를 그림으로 표시하면 [그림4-1]과 같다.

옥포해전 상황도

 

  3) 흥양 수군의 전과 및 피해

1차 출전 옥포합포적진포 해전을 통한 흥양 수군의 전과를 살펴보면 다음 <4-2>와 같다.

<4-2> 1차 출전 옥포합포적진포 해전 흥양 수군의 전과

해전지 전투편제/소속 직책() 장수 전과(전선)
옥포
(1592.5.7.)
전부장/ 흥양현감 배흥립 대선 2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 완 대선 1
우부기전통장/ 사도진 군관 이 춘 중선 1
유군장 겸 발포가장/ 본영군관 나대용 대선 2
후부장/ 녹도만호 정 운 중선 2
좌척후장/ 여도권관 김인영 중선 1
소 계 9
합포
(1592.5.7.)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 완 대선 1
소 계 1
적진포
(1592.5.8.)
사도첨사/ 김 완 대선 1
녹도만호/ 정 운 대선 1
소 계 2
총 계 12

 

<4-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흥양 수군은 옥포해전의 경우 총 26척 중 9척을 분멸시켰다. 부연하면 흥양현감 배흥립 대선 2, 사도첨사 김완이 대선 1, 발포가장 나대용이 대선 2, 녹도만호 정운이 중선 2, 여도권관 김인영이 중선 1, 그리고 사도진 군관 이춘이 중선 1척을 분멸시키는 공을 세웠다.

 

합포해전의 경우 적선 5척 중 사도첨사 김완이 대선 1척을 분멸시켰다.

적진포해전에서는 적선 13척 중 사도첨사 김완과 녹도만호 정운이 왜적의 대선 1척씩을 분멸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3차례의 해전에서 전라좌수군 전체 전사자가 1명도 없었으며, 순천부 소속의 사부 1명만 부상을 입은 완벽한 승리였다.(97쪽 부록 6 참조)

이와 같이 흥양 수군은 제1차 출전에서 44척 중 12척을 분멸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그림4-2] 1차 출전 상황도

 

 

 

참고문헌

1.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 이순신 저, 노승석 역주

2. 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 1, 2권 이민웅, 정진술, 양진석, 김경숙, 노영구, 이현진, 김남기

3. 임진왜란 흥양해전사 2016 연구 제장명, 고용규, 송은일, 김병륜, 송호철, 윤여석

4. 임진왜란과 흥양수군 2015 연구 제장명, 송은일, 정진술, 신윤호, 한성일, 송철환, 송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