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이순신의 둔전 경영
5. 이순신의 둔전 경영
1) 둔전 경영의 배경
이순신 장군이 첫 출전했던 옥포해전 당시 이순신의 수군은 30척 미만의 전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후 전선이 조금씩 늘어나기는 했으나 일본에 비해 전함 수에서 절대적인 열세였고, 그 외의 무기, 군수물자, 식량 등의 공급에 있어서 늘 열악한 상황에 직면하곤 했다.
전쟁이 발발하고 1년여가 지나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될 즈음 조선의 국력은 거의 소진되었다. 각도 군마의 수도 매우 열악했지만 그를 먹여 살릴 양식도 거의 바닥이 난 상태가 되었다. 이순신이 직접 진두지휘하던 전라도 지역의 경우 일본의 직접적인 침략으로부터 그 화를 면하고 있기는 했지만 상황이 비참하고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전투를 하고 식량을 대는 등 백성들은 더 힘들고 고달픈 생활을 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내부 약탈과 명나라 군사의 남하에 따라 상황이 더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1593년 여름 결국 전쟁이 시작된 지 1년여 만에 사실상 조선의 사활이 걸려있는 전라도 지역의 모든 물력도 고갈되었다. 그해 6월에는 순천·낙안·보성·흥양 등의 고을에 있던 군량 680여 석을 실어다 다 나누어 먹어야 할 정도의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7월 4일 광양·순천·낙안·보성·강진 등 일대의 연해 고을 백성들이 고을 수령들이 바다로 나가 관청이 비어 있는 틈을 타서 난을 일으켰다. 관청의 창고를 부수고 곡물을 약탈해 갔으며 노비와 공포(貢布)의 모든 문서들이 불살라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따라서 수군에게 군량을 공급할 지역이 사라짐으로써 명나라 군사들에게 공급하기 위해 실어놓은 군량을 옮겨다 쓸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 군사들이 들어옴에 따라 그 군사들을 접대하느라 모든 것이 말라비틀어질 정도로 남은 것이 없었다. 남하한 명나라 군사들은 마을을 드나들며 재물을 약탈하기도 하고 들판의 곡식을 망쳐서 지나가는 곳마다 판탕이 되기 일쑤였다. 이로 인해 백성들의 생활은 와해되고 달아나 다른 지방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따라서 전라도 지역의 경우 오히려 적군에게 점령당한 지역보다도 그 비참함이 더 심할 정도였다.
특히 영남지방으로 남하한 수 많은 명나라 군사들은 적을 공격하려는 의지나 계획 없이 허송세월을 하였다. 그에 반해 왜적의 세력은 배나 증가되었고 본국으로 철수할 기미도 없었다. 이런 가운데 바다에 있는 조선의 군졸들은 굶고 병들어서 스스로의 힘으로 왜적을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굶주림은 전국적인 현상이었는데, 1593년 6월 보고에 따르면, 각처에 군량이 공급되지 않아 군사들이 모두 굶주리고 있으며 심한 곳은 6-7일이나 굶었으며 도망하는 병사들이 매일 10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러한 절대적인 식량 부족 사태는 해를 넘겨서도 나아질 기미가 없었고, 갈수록 악화되었다. 1594년 봄의 상황을 살펴보면 군량미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추측 가능하다. 당시 전라좌우도 연해안의 19고을 가운데 수군에 소속된 고을은 10고을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발발한 이후 육군 진영 여러 곳에서 끊임없이 군량을 실어갔기 때문에 전부 탕갈된 상태였다. 뿐만아니라 전라좌우도의 여러 고을에서 식량이 타버린 사건까지 벌어지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경상우도 역시 탕패되어 군량을 마련할 방도가 없어서 전라도 10고을에 의존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해 볼 때 군량미를 마련하는 문제는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이순신에게 가장 어려웠고 군대 전체의 사활이 걸린 중요한 문제였다.
일반 백성들의 상황 역시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생명을 보존하고 먹고 살길이 막막한 백성들 피해자가 속출하고 살길을 찾아 떠도는 피란민들도 늘어갔다. 산야로 몸을 숨겼던 백성들 대부분은 장기간의 피난 생활로 인한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다. 당시의 참상에 대해 『난중잡록』에서는, “각도의 인민이 떠돌아 살 곳을 정하지 못해 굶어 죽은 시체가 잇달았으며, 마침내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러 아이를 잃은 자가 많았고, 산과 숲에 풀잎이며 소나무 누릅나무의 껍질과 줄기도 모두 없어졌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2) 새로운 개념의 둔전 정책 시행
전라좌수영에는 극심한 피해를 당한 영남지방 출신의 피란민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더 이상 마땅히 의탁할 곳이 없는 백성들에게는 생존을 위한 최후의 선택이나 마찬가지였다. 1593년 초에 파악된 바에 따르면 이렇게 좌수영 경내에 들어와 사는 피란민들만 200여 호에 이르렀다.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이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살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하는 것 역시 이순신의 중요한 정책이었다. 전투병들과 마찬가지로 피란민들을 굶주림으로부터 구제하는 것이 당면 과제였다. 이순신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돌산도를 선택하여 피란민들을 정착시켜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 하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돌산도의 경우 이미 둔전 경영의 전력이 있던 지역으로 좌수영과 방답 사이에 위치해 있고 산이 겹으로 둘러싸여 있어 왜적의 침입으로부터도 안정성이 보장된 지역이었다. 게다가 지세가 넓고 토질이 비옥해서 농사짓기에 적격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병조에서는 이러한 이순신의 조치에 대해 목장이 있는 곳에는 말을 기르는 일이 방해된다고 반대하였다. 이순신은 나라가 위급하고 백성이 살 곳을 잃은 데다 의지할 곳 없는 백성들의 상황을 고려하여 농사를 짓게 하더라도 말 기르는 데 해로움이 없다는 인식에서 목마구민(牧馬救民)할 수 있도록 조정에 적극적으로 요청하였다.
이순신은 이러한 만성적인 군량의 부족 문제와 군수물자 보급을 해결하기 위해 둔전을 시행했다. 모든 물력이 고갈된 상태에서 전선을 유지하고 군사를 먹여 전쟁에 대비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은 문제였다. 조정으로부터 작전에 관한 지시나 명령이 신속히 전달되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뿐만 아니라, 식량 공급 등 어떠한 군사적 지원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더구나 군영만이 아니라 지역 전체의 백성들이 안전하게 먹고 살 수 있도록 정책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이순신의 비중은 막대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군량미 문제의 해결은 말 그대로 병사들을 먹이는 단순한 의미에 그치지 않았다. 전염병으로 고생하는 군졸들이 굶주림 때문에 더 많은 고통과 피해를 입고 있었기에 그 중요성은 더욱 컸다. 충분한 식사와 영양이 공급된다면 보다 쉽게 회복할 수도 있는 병졸들이 굶주림으로 인해서 회복하지 못하고 병이 악화되거나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이었다.
이순신은 둔전 경영으로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고, 둔전은 노약한 군사들을 제대시켜서 군영에서 편리한 지형을 선택하여 경작시키는 것이 기본 논리였다. 둔전의 조직적인 경영은 군사들의 식량 문제도 해결하고 떠도는 백성들의 민생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적극적 정책이었다. 또한 육지로부터 군량을 실어 나르는 불편함을 해소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따라서 이순신은 둔전의 조직적이고 전문적인 경영이 시무(時務)에 가장 합당하다 판단했고, 이를 통해 전쟁이 장기화될 것에 대비한 물질적 기초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순신은 조산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으로서 둔전을 경영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이순신은 둔전의 효용성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따라서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으로 둔전경영을 추진했던 것이다.
3) 둔전 경영으로 군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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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좌우도에 설치되었던 둔전 위치도 |
이순신은 둔전 경영지로 순천의 돌산도, 흥양의 도양장, 해남의 황원곶, 강진의 화이도 등지를 채택하였다. 이중 돌산도는 원래 나라에서 주관하던 둔전으로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늙어서 남아있는 군사들을 뽑아서 농사짓게 하여 중정조(中正租) 500석의 수확을 거두었고, 그것을 종자로 쓰기 위해 순천 창고에 보관하기도 하는 등 실질적인 성과를 내었다.
둔전을 경영하는데 있어서 몇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었다. 우선은 둔전을 전문적으로 관리할 적절한 인물을 선발하는 문제였다. 다음으로 둔전에서 농사를 지을 농군을 어떻게 충원하느냐의 문제였다. 전쟁 중 싸움에 전념해야 하는 군사들을 차출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따라서 병사들의 경우 싸움에서 돌아와 쉬는 기간을 활용하는 방안만이 가능했다. 그리고 부족한 노동력을 어떻게 채우느냐의 과제가 남아있었다.
둔전경영을 본격적으로 관리하는데 이순신은 휘하의 유능한 부하들에게 권한을 이임하여 실행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이순신은 둔전을 설치하도록 요청하는 장계를 올림과 동시에 전 장흥부사 정경달(丁景達)을 자신의 종사관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순신은 정경달로 하여금 논이나 밭으로 개간이 가능한 비어있는 넓은 땅을 조사하고 둔전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겨서 경영에 효율성을 기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군관 훈련주부 송성을 돌산도로, 훈련정(訓鍊正) 이기남을 도양장에 농감관(農監官)으로 파견하여 농사를 지도 감독하게 하였다. 전라우도의 화이도와 황원곶 등에는 정경달을 파견하여 둔전의 환경을 살피고 제 때 맞춰 시행하도록 했다.
다음으로 둔전을 실질적으로 경작하는데 농군과 일반 백성들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돌산도의 경우 순천의 유방군은 광양땅 두치에 신설되는 첨사진으로 이동시켜 방비시킨다는 계획에 따라 농군의 징발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순신은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인력으로 각도에 떠도는 피란민을 활용할 것을 계획하였다. 정착해서 살 곳도 없고, 먹고 살 생업도 없는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는 백성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을 모아서 돌산도에 살게 하고, 농토를 개간하여 농사짓게 한 후 수확량을 반씩 나누어 갖도록 한다는 방책을 마련하였다.
흥양현의 경우 유방군은 도양장(道陽場)으로 들어가 농사짓게 하고, 그 밖의 남은 땅은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어 소작케 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실제로 유방군을 마음대로 시킬 수 있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시행에 어려움이 따랐다. 감사나 병사가 그 시기에 맞춰 시행해야 하는데, 봄 농사철은 다가오고 그 실행 여부에 대한 답이 없을 경우 곤란에 봉착했기 때문이었다.
전라우도의 강진땅 고이도와 해남 땅 황원 목장은 토지가 비옥하고 농사지을 만한 땅이 넓어서, 무려 천여 석 종자를 부릴 수 있을 규모였다. 따라서 때에 맞춰 경작하면 이익은 무궁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역시 농군을 뽑아낼 길이 없었다. 이곳도 이순신은 백성들에게 나누어 소작을 주어 나라에서 절반만 거둬들여도 충분히 군량에 보충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렇게 이순신은 둔전 경영을 통해 군량도 마련하고 백성들을 정착시켜 먹고 살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마련했지만 그 시행에 있어서는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돌산도의 경우 각처에 수비하는 군사들 중에서 적당히 뽑아내어 경작케 하려 하였으나, 곳곳에 변방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뽑아낼 사람이 없었다. 결국 돌산도는 끝내 개간하지 못하고 그대로 묵히고 말았다. 또한 정경달은 둔전 경영에 정성을 다하여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으나, 감사로부터 감사 이외에는 둔전을 경작하거나 검사할 수 없도록 하는 공문을 받고 상당한 차질을 빚었다. 게다가 둔전 경영을 전담하던 정경달이 함양군수로 옮기면서 둔전의 수확이 불투명해지는 상황에 처하기도 하였다. 둔전을 감독하는 직책에 관련해서도 둔전관을 감목관이 겸임한다는 방침이 내려오면서 난관에 부딪치기도 했다. 둔전관을 겸해야 하는 감목관이 전출된 후 후임이 내려오지 않거나(돌산도의 경우), 감목관(차덕령)이 말 먹이는 백성들을 학대하는 일이 발생(흥양의 경우)하면서 시행에 많은 장애 요인들이 있었다.
이러한 우여곡절 속에서도 이순신의 둔전 경영은 다음을 통해 그 성과를 알 수 있다.
1594년 시행 첫해에 돌산도에서 정조벼 500섬을 수확하여 이듬해 종자 문제를 해결하였고,
1595년 2월 13일 도양 둔전에서 조세 300석을 실어와 각 포구에 나눠주었고,
1595년 11월 13일 도양장에서 추수한 벼와 콩이 820석이었다.
또한 둔전 경영은 일시적인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장기적으로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1596년 정월 20일 낙안 선의문이 와서 둔전에서 추수한 벼를 실어왔다는 보고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1596년 2월 달에는 이순신이 군량에 대한 장부를 만들고 흥양 둔전에서 추수한 벼 352석을 받아들였고, 흥양의 유사 송상문이 와서 쌀과 벼를 합해 7섬을 바쳤으며, 순천 둔전에서 추수한 벼를 직접 보는 앞에서 받아들이거나 둔전에서 받아들인 벼를 다시 되질하는 것을 감독하였다는 등의 기록으로 보아 이순신의 지도 아래 둔전이 조직적으로 경영되었고 부족한 군량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1. 녹도문화연구회 심포지움 자료집(2024.11.28. 마리안느와 마가렛 연수원)